주인이 모두 누구인지 몰라 안내문이 없다...황량한 갈대밭 사이에서 환성사를 지키고 있다.

대웅전
환성사는 팔공산 기슭에 있는 절로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가 처음 지었으나 고려 후기에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신감대사가 다시 지었으며, 광무 원년(1897)
항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남향하고 있으며 환성사의 중심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만 굵고 높거나
크지 않고 건물의 앞면과 옆면 길이가 거의 같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뒤쪽으로 화려한 불단이 있는데 목공예적인 장식으로 아름답다. 1976년 낡은 목재를 갈아내고
단청 무늬와 퇴색된 색채에 비슷하게 보수하였으며, 바깥쪽 단청은 새로 칠하여 옛 것과 새 것의 색이 섞여있다.
건물의 구조나 단청이 대체로 예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이다.
-안내문에서 발췌-
불신자가 아닌지라..들어가 보지 못해서 불단을 못봤는데 자료사진을 보니 정말 멋지게 되어 있었다. 오오..
또한 탑의 모양이 꽤 특이한데 안내문이 없어서 참...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ㅠㅠ

햇빛을 바로 봐버리면 플레어 때문인지 9개(8개?)의 빨간 점이 생긴다. ㅡㅡㅋ ㄷㄷ

공포가 웬지 마음에 든다. ㅎㅎ

대웅전 주변은 대나무가 울창하다.

산령각에는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가 모셔져 있습니다. 독성탱화는 남인도의
천태산을 배경으로 나무아래 앉아서 수도하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그린 그림입니다. 산신탱화는
호랑의 변화신인 산신을 중심으로 반드시 호랑이와 함께 그리는 것이 특징으로 지팡이를 들고 있는
늙은 산신 앞에 호랑이가 엄호하고 있습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특이(?)하게 두장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환성사 유래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 150번지에 위치한 환성사는 신라 흥덕왕 10년에 41대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이 절에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심지왕사가 절을 짓고 난 후부터 갑자기 절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하루에도 수백명이
넘는 신도들이 드나들어 잠시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절에서는 매일같이 수백명이 넘는 밥을 해대려니
이에 소모되는 곡식이려니와 취사에 시중드는 식솔 또한 엄청난 숫자가 상시 고용되어야만 했다. 콩나물
반찬을 하려면 보통 시루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둘레가 수 십자나 되는 돌시루를 만들어 콩나물을 해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 때 이 절의 주지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또 한번 이 절에서 위대한 선사가 났으므로 사찰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큰 일주문을 세우고 대웅전 앞쪽에 큰 연못을 파고 큰 누각을 짓고 이름을 수월관이라 했다.
이는 달이 떠 연못에 비치는 광경을 수월관에서 보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 선사께서는
수월관 앞의 연못을 보며 "만일 이 연못을 메우면 이 절의 불기가 쇠하리라"하고 예연했으므로 역대 주지스님들이
이 연못을 소중히 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니 이 얘기를 아는 이가 적어지고 전설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도 이 절 입구에는
큰 자라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자라와 너무나 닮아서 붙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십지왕사가 이 곳에 절터를 잡을 때
이 바위를 보고서 이 바위가 있는 한 이 절은 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는데 이 또한 희미한 기억 속의 전설이 되었다.
때는 조선 초, 조선이 불교를 심하게 억압하였으나 환성사만은 하루도 신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한 스님이
이 곳에 주지로 있으면서 젊어서는 큰 덕으로 불자의 숭앙을 받았으나 늙어서는 게으름이 늘어 손님이 많은 것이 귀찮게
되어 혼자 곰곰히 생각한 끝에 사람들을 시켜 절 입구의 자라바위의 목을 자르게 했다. 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갑자기 연못의 물이 붉게 변하여 이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절이 오히려 더 소란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거지같은 객승이 찾아와 묵고 가기를 청하니 주지가 이를 귀찮게 여기며 구석진 골방을 주고 음식접대도 제대로 하지
않자 이튿날 객승이 길을 떠나면서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우시고."라고 말했다. 주지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마을사람들을 불러 못을 메우게 했다.
그런데 흙을 한 삽 퍼붓자 갑자기 물 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슬피 울고는 산 넘어 동화사 쪽으로
날아갔다 한다. 동네 사람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메우려 하지 않자 주지는 절의 스님들을 동원 해 메우게 했다. 꼬박
백일이 걸려 못을 메우고 마지막 한 삽 흙을 퍼붓자 갑자기 온 절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그 웅장하던 건물들을 모조리
태우고 말았다고 한다. 겨우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으나 이 후로는 그 절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에 남은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고 또 현재의 환성사 <무학선원> 선감 강설스님이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며 크게 불사에 이르므로 새로 사찰이 부흥하기 위해 메웠던 용연을 복원하여 물속에서 날아오른 금송아지를
다시 용연으로 날아와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 수 있도록 복원 불사를 하게됩니다. 신도들의 발길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영험있는 사찰로 차츰 알려지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안내판에서 발췌-
상당히 길지만 그래도 자세히 유래를 밝혀 놓아서 좋았다. 나중에 집에서 아는 것보다...


환성사는 시내(?)에서 가까운 것 치고는 가기가 어려운 절이다. 표지판은 적당히 되어 있지만
가는 길이 워낙에 구불구불하고 멀어서 처음엔 가까운 줄 알고 시작했다가 한참가야했다. ㄷㄷ
그래도 가 볼만한 절이다.


대웅전
환성사는 팔공산 기슭에 있는 절로 흥덕왕 10년(835)에 심지왕사가 처음 지었으나 고려 후기에
화재로 불타버렸다고 한다. 조선 인조 13년(1635)에 신감대사가 다시 지었으며, 광무 원년(1897)
항월대사가 다시 세운 것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웅전은 남향하고 있으며 환성사의 중심 건물로 앞면 5칸 ·옆면 4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기둥은 가운데만 굵고 높거나
크지 않고 건물의 앞면과 옆면 길이가 거의 같기 때문에 매우 안정된 비례를 이루고 있다.
내부에는 뒤쪽으로 화려한 불단이 있는데 목공예적인 장식으로 아름답다. 1976년 낡은 목재를 갈아내고
단청 무늬와 퇴색된 색채에 비슷하게 보수하였으며, 바깥쪽 단청은 새로 칠하여 옛 것과 새 것의 색이 섞여있다.
건물의 구조나 단청이 대체로 예스러움을 지니고 있는 건축물이다.
-안내문에서 발췌-
불신자가 아닌지라..들어가 보지 못해서 불단을 못봤는데 자료사진을 보니 정말 멋지게 되어 있었다. 오오..
또한 탑의 모양이 꽤 특이한데 안내문이 없어서 참...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 전혀 알 길이 없었다. ㅠㅠ

햇빛을 바로 봐버리면 플레어 때문인지 9개(8개?)의 빨간 점이 생긴다. ㅡㅡㅋ ㄷㄷ

공포가 웬지 마음에 든다. ㅎㅎ

대웅전 주변은 대나무가 울창하다.

산령각에는 산신탱화(山神幀畵)와 독성탱화(獨聖幀畵)가 모셔져 있습니다. 독성탱화는 남인도의
천태산을 배경으로 나무아래 앉아서 수도하는 나반존자(那畔尊者)를 그린 그림입니다. 산신탱화는
호랑의 변화신인 산신을 중심으로 반드시 호랑이와 함께 그리는 것이 특징으로 지팡이를 들고 있는
늙은 산신 앞에 호랑이가 엄호하고 있습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특이(?)하게 두장의 탱화가 모셔져 있다.

환성사 유래
경산시 하양읍 사기리 150번지에 위치한 환성사는 신라 흥덕왕 10년에 41대 헌덕왕의 아들인 심지왕사가
이 절에 주지로 있으면서 창건하였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은 심지왕사가 절을 짓고 난 후부터 갑자기 절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하루에도 수백명이
넘는 신도들이 드나들어 잠시도 한가한 날이 없었다고 한다. 절에서는 매일같이 수백명이 넘는 밥을 해대려니
이에 소모되는 곡식이려니와 취사에 시중드는 식솔 또한 엄청난 숫자가 상시 고용되어야만 했다. 콩나물
반찬을 하려면 보통 시루로는 감당할 수 없어서 둘레가 수 십자나 되는 돌시루를 만들어 콩나물을 해 먹이기도
했다고 한다. 고려 때 이 절의 주지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나 또 한번 이 절에서 위대한 선사가 났으므로 사찰에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큰 일주문을 세우고 대웅전 앞쪽에 큰 연못을 파고 큰 누각을 짓고 이름을 수월관이라 했다.
이는 달이 떠 연못에 비치는 광경을 수월관에서 보면 너무나 아름답기 때문에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이 선사께서는
수월관 앞의 연못을 보며 "만일 이 연못을 메우면 이 절의 불기가 쇠하리라"하고 예연했으므로 역대 주지스님들이
이 연못을 소중히 관리했다고 한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니 이 얘기를 아는 이가 적어지고 전설처럼 희미한 기억 속에만 남게 되었다. 도 이 절 입구에는
큰 자라바위가 있었는데 그 모양이 자라와 너무나 닮아서 붙인 이름이었다고 한다. 십지왕사가 이 곳에 절터를 잡을 때
이 바위를 보고서 이 바위가 있는 한 이 절은 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는데 이 또한 희미한 기억 속의 전설이 되었다.
때는 조선 초, 조선이 불교를 심하게 억압하였으나 환성사만은 하루도 신도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 한 스님이
이 곳에 주지로 있으면서 젊어서는 큰 덕으로 불자의 숭앙을 받았으나 늙어서는 게으름이 늘어 손님이 많은 것이 귀찮게
되어 혼자 곰곰히 생각한 끝에 사람들을 시켜 절 입구의 자라바위의 목을 자르게 했다. 바위의 목을 정으로 깨뜨리니
갑자기 연못의 물이 붉게 변하여 이것을 구경하려는 사람들로 절이 오히려 더 소란해졌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거지같은 객승이 찾아와 묵고 가기를 청하니 주지가 이를 귀찮게 여기며 구석진 골방을 주고 음식접대도 제대로 하지
않자 이튿날 객승이 길을 떠나면서 "이 절에 사람이 많은 것은 저 연못 때문이니 저것을 메우시고."라고 말했다. 주지는
이 말을 듣고 즉시 마을사람들을 불러 못을 메우게 했다.
그런데 흙을 한 삽 퍼붓자 갑자기 물 속에서 금송아지 한 마리가 날아오르더니 슬피 울고는 산 넘어 동화사 쪽으로
날아갔다 한다. 동네 사람들은 겁을 먹고 더 이상 메우려 하지 않자 주지는 절의 스님들을 동원 해 메우게 했다. 꼬박
백일이 걸려 못을 메우고 마지막 한 삽 흙을 퍼붓자 갑자기 온 절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그 웅장하던 건물들을 모조리
태우고 말았다고 한다. 겨우 대웅전과 수월관만 남았으나 이 후로는 그 절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고 말았다고 한다.
지금은 당시에 남은 건물이 보물로 지정되고 또 현재의 환성사 <무학선원> 선감 강설스님이 당시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며 크게 불사에 이르므로 새로 사찰이 부흥하기 위해 메웠던 용연을 복원하여 물속에서 날아오른 금송아지를
다시 용연으로 날아와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살 수 있도록 복원 불사를 하게됩니다. 신도들의 발길 또한 눈에 띄게
늘어나면서 영험있는 사찰로 차츰 알려지게 되리라 생각됩니다.
-안내판에서 발췌-
상당히 길지만 그래도 자세히 유래를 밝혀 놓아서 좋았다. 나중에 집에서 아는 것보다...


환성사는 시내(?)에서 가까운 것 치고는 가기가 어려운 절이다. 표지판은 적당히 되어 있지만
가는 길이 워낙에 구불구불하고 멀어서 처음엔 가까운 줄 알고 시작했다가 한참가야했다. ㄷㄷ
그래도 가 볼만한 절이다.

덧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