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문
큰 둥근기둥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올렸고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창방과 대들보의 이음새에도 꽃우로 장식하였고 쇠서(牛舌) 끝을 연꽃으로 조각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주문 편액
일주문 정면에는 '비슬산 용연사 자운문(琵瑟山龍淵寺慈雲門)'이라고 적혀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비슬산의 우리말 벼슬산의 한자 표기로 불교식 의미가 첨가된 이름이다. 비슬이란 말은 고대인도 힌두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용연사는 절근처
골짜기에 신룡(神龍)이 사는 굴이 있어서 이름하게 되었다는 사적기의 기록이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비슬산에 그런 뜻이 있었다니...흠흠...

크기도 크기고 단청이 벗겨지긴 했지만 정말 화려하다.

적멸보궁
부처님의 육신과 다름없는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보궁의 유래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께서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신 가피력으로 금란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돌아와서 설악산의 봉정암, 영축산의 통도사, 사자산의 법흥사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여 이를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강원도의 건봉사, 선산의 도리사와 더불어 이곳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우리나라의
8대 보궁 중의 한 곳으로 영남지방의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부처님의 훈향을 느낄 수 있는 성지이다.
용연사의 보궁은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스님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셔가던 중 사리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여 그 역사적 가치가 더 큰 곳이다.
-안내판에서 발췌-
극락전과 구분되어 조성되어 있는 건물로 잘 다듬어진 축대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져 있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며 처마는 둥근 서까래와 네모진 서까래를 덧댄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올렸다. 건물 창호는 각 3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정자(井)살창으로 짜여져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그래도 진신사리를 꽤 많이 들여왔다고 알고 있는데....찾아보니 사실 사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과 스님들은 물질적인 것에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는데 후세들이 그걸 어기는 것이라 한다.
역시 불교가 좀 짱인듯...

적멸보궁 안..석조계단이 보이도록 큰 창을 내 놓았다. 그 안에서 불공을 드리는 듯...오오..

석조계단
계단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이 곳에서 승려들이 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행한다. 신성한 곳으로
금강계단이라고도 한다. 통상 앞쪽에 적멸보궁이라고 하는 전각을 설치하는데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가 곧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석조계단은 널찍한 2중기단 위에 종 모양의 탑 몸돌을 올렸다. 아래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여 사방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장상(불법을 지키는 여덞의 신장을 새긴 것)을
돋을새김하여 단조로움을 덜어주고 있다. 몸돌 위로는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조각해두었다.
1934년에는 계단 주위에 돌난간을 둘렀다. 절 안에 있는 석가여래비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계단을 쌓았는데
1613년(광해군 5)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작연대가 분명하여 당시 석조건축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에서 발췌-
현재 보물 제539호로 지정된 금강계단(金剛戒壇)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통도사의 금강계단,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戒壇形) 사리탑이다. 이곳의 석가여래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 대사가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용연사에 봉안토록 한 것이다.
적멸보궁 법당은 다른 보궁과 같이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뒤쪽 벽을 유리로 하여 사리탑을 바라보면서
참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계단은 1673년(현종 14)에 완성되었는데, 그 내역은 사리탑 오른쪽에
있는 '사바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손하자 사명 대사가 왜적을 물리치고 사리를 안전하게 모셔서
금강산으로 가지고 가서 서산 대사에게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다. 서산 대사는 본래의 자리에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하여,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다시 모시도록 했으나 만일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제자 선화(禪和)에게
태백산 보현사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영남 지방이 안정되기 전이어서 미처 통도사에
봉안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였고, 사명 대사는 포로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에 다녀 온 뒤 곧 입적하자 그 사리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남게 되었다. 얼마 후 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이를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모신 뒤
대중과 상의하여 탑을 세워 봉안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본래의 봉안처인 통도사로 되돌려 모셔야 한다는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뜻을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는 통도사에 보내고, 1과만 이곳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고 한다. 1673년에 완성되었으니 통도사 계단이 파헤쳐진 지 80여 년만에 다시 봉안된 것이다.
이 사리탑은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듬직한 정방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얇은 원형 괴임돌을 두 개 포갠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아랫부분에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 부분을 지나면서
좁아지는 범종처럼 매우 안정감 있고 균형 잡힌 형태를 띠고 있다. 석종의 윗부분에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봉오리를 봉긋하게 새겨 보주를 대신하고 있다. 2단의 기단 중
상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의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네 면을 여덟 칸으로 나눈 뒤,
칸마다 팔부중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하층 기단은 아무 무늬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하였다.
네 모서리에는 본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몇 차례 도난을 겨우 모면하고 나서 지금은 극락전 안으로 옮겨 두었다.
이 사천왕상은 조각 솜씨가 빼어나서 조선시대의 석조각 작품 중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아기 체구에
큼지막한 코와 왕방울 눈을 가지고 귀면 갑옷을 입은 무사상이지만 주먹을 쥔 모습과 몸의 다양한 자세가 매우 역동적이다.
상층 기단의 팔부중과 함께 단조롭고 무거울 수 있는 사리탑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멋진 조각이다. 기단 주위로는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팔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워 연결하였다. 그곳 난간에 촘촘한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하였으나, 다소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계단 앞의 상석(床石)도 그 두툼한 형태가
탑의 기단부와 닮아 보이고, 옆의 석등도 그 솜씨로 보아 난간을 만들 때 함께 조성한 듯하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확실히 전통사찰사이트를 알게 된 이 후 좀 더 정보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어서 좋다. ㅎㅎ


큰 둥근기둥에 창방(昌枋)과 평방(平枋)을 짜올렸고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창방과 대들보의 이음새에도 꽃우로 장식하였고 쇠서(牛舌) 끝을 연꽃으로 조각하여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일주문 편액
일주문 정면에는 '비슬산 용연사 자운문(琵瑟山龍淵寺慈雲門)'이라고 적혀있는 현판이 걸려 있다.
비슬산의 우리말 벼슬산의 한자 표기로 불교식 의미가 첨가된 이름이다. 비슬이란 말은 고대인도 힌두신으로
불교에 수용된 비슈누(Visnu)를 한자로 음역한 비슬노(毘瑟怒)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용연사는 절근처
골짜기에 신룡(神龍)이 사는 굴이 있어서 이름하게 되었다는 사적기의 기록이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비슬산에 그런 뜻이 있었다니...흠흠...

크기도 크기고 단청이 벗겨지긴 했지만 정말 화려하다.

적멸보궁
부처님의 육신과 다름없는 진신사리를 모신 곳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보궁의 유래는 신라시대 자장율사께서 중국 오대산에서 기도하신 가피력으로 금란가사와 사리를 모시고
돌아와서 설악산의 봉정암, 영축산의 통도사, 사자산의 법흥사에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하여 이를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강원도의 건봉사, 선산의 도리사와 더불어 이곳 용연사의 적멸보궁은 우리나라의
8대 보궁 중의 한 곳으로 영남지방의 영험한 기도 도량으로 부처님의 훈향을 느낄 수 있는 성지이다.
용연사의 보궁은 사명대사의 제자 청진스님이 임진왜란 때 왜적을 피해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통도사에서
금강산으로 모셔가던 중 사리 1과를 용연사에 봉안하여 그 역사적 가치가 더 큰 곳이다.
-안내판에서 발췌-
극락전과 구분되어 조성되어 있는 건물로 잘 다듬어진 축대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세워져 있다.
공포는 다포식으로 화려하며 처마는 둥근 서까래와 네모진 서까래를 덧댄 겹처마이고 지붕은 팔작지붕을
올렸다. 건물 창호는 각 3분합의 문을 달았으며, 정자(井)살창으로 짜여져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그래도 진신사리를 꽤 많이 들여왔다고 알고 있는데....찾아보니 사실 사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고
부처님과 스님들은 물질적인 것에 신경쓰지 말라고 하였는데 후세들이 그걸 어기는 것이라 한다.
역시 불교가 좀 짱인듯...

적멸보궁 안..석조계단이 보이도록 큰 창을 내 놓았다. 그 안에서 불공을 드리는 듯...오오..

석조계단
계단이란 부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이 곳에서 승려들이 계를 수여하는 의식을 행한다. 신성한 곳으로
금강계단이라고도 한다. 통상 앞쪽에 적멸보궁이라고 하는 전각을 설치하는데 불상을 봉안하지 않은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금강계단에 모셔진 사리가 곧 예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 석조계단은 널찍한 2중기단 위에 종 모양의 탑 몸돌을 올렸다. 아래층 기단의 각 모서리에는 사천왕상을
배치하여 사방을 수호하도록 하였다. 위층 기단의 각 면에는 팔부신장상(불법을 지키는 여덞의 신장을 새긴 것)을
돋을새김하여 단조로움을 덜어주고 있다. 몸돌 위로는 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을 조각해두었다.
1934년에는 계단 주위에 돌난간을 둘렀다. 절 안에 있는 석가여래비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시고 계단을 쌓았는데
1613년(광해군 5)에 완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제작연대가 분명하여 당시 석조건축 연구의 귀한 자료가 된다.
-안내문에서 발췌-
현재 보물 제539호로 지정된 금강계단(金剛戒壇)에는 진신사리가 봉안되어 있는데, 통도사의 금강계단,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과 더불어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계단형(戒壇形) 사리탑이다. 이곳의 석가여래
사리는 본래 통도사에 있던 것으로 사명 대사가 제자 청진(淸振)을 시켜 용연사에 봉안토록 한 것이다.
적멸보궁 법당은 다른 보궁과 같이 안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뒤쪽 벽을 유리로 하여 사리탑을 바라보면서
참배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이 계단은 1673년(현종 14)에 완성되었는데, 그 내역은 사리탑 오른쪽에
있는 '사바교주석가여래부도비명(娑婆敎主釋迦如來浮屠碑銘)'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때 왜적이 통도사의 사리탑을 파손하자 사명 대사가 왜적을 물리치고 사리를 안전하게 모셔서
금강산으로 가지고 가서 서산 대사에게 어찌할 것인가를 물었다. 서산 대사는 본래의 자리에 마땅히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하여, 사리함 하나는 통도사에 다시 모시도록 했으나 만일을 위해서 다른 하나는 제자 선화(禪和)에게
태백산 보현사에 모시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때는 아직 영남 지방이 안정되기 전이어서 미처 통도사에
봉안 사업을 시작하지 못하였고, 사명 대사는 포로 송환 교섭을 위해 일본에 다녀 온 뒤 곧 입적하자 그 사리는
치악산 각림사(覺林寺)에 남게 되었다. 얼마 후 그의 제자 청진(淸振)이 이를 비슬산 용연사에 옮겨 모신 뒤
대중과 상의하여 탑을 세워 봉안하기로 하였다. 그러면서 본래의 봉안처인 통도사로 되돌려 모셔야 한다는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의 뜻을 받들어 사리 2과 중 1과는 통도사에 보내고, 1과만 이곳 용연사 북쪽 기슭에
봉안했다고 한다. 1673년에 완성되었으니 통도사 계단이 파헤쳐진 지 80여 년만에 다시 봉안된 것이다.
이 사리탑은 2단으로 된 기단 위에 듬직한 정방형의 괴임돌을 놓고 그 위에 다시 얇은 원형 괴임돌을 두 개 포갠
위에 석종형 탑신을 올렸다. 탑신은 아랫부분에서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조금씩 넓어졌다가 중간 부분을 지나면서
좁아지는 범종처럼 매우 안정감 있고 균형 잡힌 형태를 띠고 있다. 석종의 윗부분에 구슬 무늬를 1줄로 두르고
겹으로 된 연꽃 무늬 위에 꽃받침 속에서 피어나는 연봉오리를 봉긋하게 새겨 보주를 대신하고 있다. 2단의 기단 중
상층은 두툼한 갑석 아래 사방으로 귀기둥을 세우고 각면의 가운데에 탱주를 새겨 네 면을 여덟 칸으로 나눈 뒤,
칸마다 팔부중을 하나씩 도드라지게 조각하였다. 하층 기단은 아무 무늬 없는 장대석으로 마감하였다.
네 모서리에는 본래 사천왕상이 있었으나 몇 차례 도난을 겨우 모면하고 나서 지금은 극락전 안으로 옮겨 두었다.
이 사천왕상은 조각 솜씨가 빼어나서 조선시대의 석조각 작품 중 대표작이라 할만하다. 마치 서너 살 먹은 아기 체구에
큼지막한 코와 왕방울 눈을 가지고 귀면 갑옷을 입은 무사상이지만 주먹을 쥔 모습과 몸의 다양한 자세가 매우 역동적이다.
상층 기단의 팔부중과 함께 단조롭고 무거울 수 있는 사리탑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멋진 조각이다. 기단 주위로는
12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팔각으로 깎은 돌을 그 중간에 끼워 연결하였다. 그곳 난간에 촘촘한 쇠창살을 꽂은 것은
1934년에 탑을 보호하고자 설치하였으나, 다소 답답한 느낌을 주고 있다. 계단 앞의 상석(床石)도 그 두툼한 형태가
탑의 기단부와 닮아 보이고, 옆의 석등도 그 솜씨로 보아 난간을 만들 때 함께 조성한 듯하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확실히 전통사찰사이트를 알게 된 이 후 좀 더 정보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어서 좋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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