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동서원-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오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도 없애지 않고 남겨둔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본디 서원은 비슬산 기슭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1605년(선조38)에 현재 자리에 다시
세우고 보로동 서원이라 불렀다. 1607년에 도동서원이란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인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반의 규모이며, 지붕은 사람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초장치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식이다.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담당하는 공간인 사당도 지붕과 공포의 양식은 강당과 같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삼가고 간소하게 지어 조선중기 서원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김굉필나무
김굉필은 조선 전기때 성리학자로, 호는 한훤당이며, 시호는 문경공으로 본관은 서흥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불렀다. 학문적으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인 전라도 순천에서 돌아가셨다.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의 오현 중 수현으로 불리워진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된 이 은행나무는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7년 한강 정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나 성리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김굉필나무"라 이름지었다.
-안내문에서 발췌-
용계은행나무처럼 오래되서 받쳐야만 하는데 멋지게 만들었다. 오오~



신도비
죽은 사람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한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수월루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설 때는 없었던 건물로 1855년 창건되었다.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을 출입하기에 가파르고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은지 얼마 안된 1888년 불타버려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 다른 건물의 담백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부재들이나 구조도 빈약하여
오히려 도동서원의 품격에 흠이 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나로서도 동의 하는 부분...다른 서원들에서 이런 경우를 보지도 못했거니와 우리나라의 서원이란 건물에서 느껴지는
학자적(?) 분위기를 수월루가 많이 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만들어도 오래되어 들어가보지도
못할 것을....그래도 최근에 만든게 아니니 복원하긴 했어야할 지도 모르겠다. 흠흠..


전사청
도동서원 관리하시는 집...후예이신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ㅡㅡ;;
환주문이 닫혀있었기에 안을 둘러보지 못하려나...했는데 이쪽을 통해서 갈 수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지는... 그래도 나중에 더 많은 관광객이 오셔서 안심 ㅡㅡㅋ)

입춘대길~ 이제 슬슬 본격적인 봄이다!

완전 똥개....나중엔 된장바를려나 ㅡㅡ;;? 왜 우리 안에 있는거지..

왔는가 자네~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대원군 때 서원철폐령에도 없애지 않고 남겨둔
전국 47개 주요 서원 중의 하나이다.
본디 서원은 비슬산 기슭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뒤 1605년(선조38)에 현재 자리에 다시
세우고 보로동 서원이라 불렀다. 1607년에 도동서원이란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행사와 교육의 중심인 강당은 앞면 5칸, 옆면 2칸 반의 규모이며, 지붕은 사람인자 모양의 맞배지붕이고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초장치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식이다. 김굉필 선생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를
담당하는 공간인 사당도 지붕과 공포의 양식은 강당과 같다. 강당을 둘러싼 담장은 기와를 이용해 쌓아
아름다움을 더한다. 불필요한 장식을 삼가고 간소하게 지어 조선중기 서원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김굉필나무
김굉필은 조선 전기때 성리학자로, 호는 한훤당이며, 시호는 문경공으로 본관은 서흥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소학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라 불렀다. 학문적으로 정몽주, 길재, 김숙자,
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고,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유배지인 전라도 순천에서 돌아가셨다.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의 오현 중 수현으로 불리워진다.
수령이 400년 정도 된 이 은행나무는 선생을 모신 도동서원이 사액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7년 한강 정구가 심은 것으로
전해지나 성리학 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친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김굉필나무"라 이름지었다.
-안내문에서 발췌-
용계은행나무처럼 오래되서 받쳐야만 하는데 멋지게 만들었다. 오오~



신도비
죽은 사람의 생전의 행적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우는 비이다.
조선시대에는 정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사람 중 위업을 세웠거나 학문이 뛰어나
후세에 모범이 될 때에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한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얹은 모습이다.

수월루
애초 이곳에 서원이 들어설 때는 없었던 건물로 1855년 창건되었다. "서원의 제도를 갖추려면 누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과 "서원을 출입하기에 가파르고 답답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지은지 얼마 안된 1888년 불타버려 오랫동안 터만
남았다가 1973년 복원되었다. 다른 건물의 담백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부재들이나 구조도 빈약하여
오히려 도동서원의 품격에 흠이 된다.
-답사여행의 길잡이에서 발췌-
나로서도 동의 하는 부분...다른 서원들에서 이런 경우를 보지도 못했거니와 우리나라의 서원이란 건물에서 느껴지는
학자적(?) 분위기를 수월루가 많이 해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차피 만들어도 오래되어 들어가보지도
못할 것을....그래도 최근에 만든게 아니니 복원하긴 했어야할 지도 모르겠다. 흠흠..


전사청
도동서원 관리하시는 집...후예이신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ㅡㅡ;;
환주문이 닫혀있었기에 안을 둘러보지 못하려나...했는데 이쪽을 통해서 갈 수 있었다.
(들어가도 되는지는... 그래도 나중에 더 많은 관광객이 오셔서 안심 ㅡㅡㅋ)

입춘대길~ 이제 슬슬 본격적인 봄이다!

완전 똥개....나중엔 된장바를려나 ㅡㅡ;;? 왜 우리 안에 있는거지..

왔는가 자네~

덧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