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륵사] 극락보전+다층석탑+구룡루+다층전탑+대장각기비+강월헌+낙조 by 타누키

극락보전
사찰 경내 중심부에 있는 극락보전은 절의 본당으로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로 지정되어 있다. 1379년(우왕 5)에 각신과
각주 등의 스님이 중창하였고 1440년(세종 22)에 또 한차례의 중수를 거쳐 영릉의 원찰이 된 후 1473년(성종 4)에도 대대적
중수가 있었다. 지금은 1799년(정조 2)부터 1800년(정조 3) 까지 중수했던 모습이 남아있다. 양식적으로 보면 앞면과 옆면
각 3칸의 팔작지붕으로 자연석의 주춧돌 위에 흘림기둥을 세우고 다포식 공법으로 지은 조선 말기의 특징을 지녔다.천정은
우물천정이고 불단 위에는 닫집이 있다. 불단인 수미단은 안상(眼象) 모습의 창 안에 학,연꽃,코끼리 등을 표현하였다.
천정 아래 대들보에는 나옹 스님이 썼다고 전해오는 '천추만세(千秋萬世)'라고 쓴 현판이 걸려져 있다. 극락보전 편액은
도서(圖署)나 관지(款識)가 없어 작가와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71년 김수항 등의 지원에 힘입어 중수할 때 쓴
글씨로 추정된다. 석봉체의 강경(强勁)한 바탕 위에 송설체의 부드러움이 잘 조화되어 있다. 주련은 4점이 걸려 있는데
우리나라 근대의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의 글씨다.
그 내용과 뜻은 다음과 같다.

具足神通力(구족신통력) 신통력을 갖추시고
廣修智方便(광수지방편) 지혜와 방편을 널리 닦으시어
十方諸國土(시방제국토) 시방의 모든 국토에
無刹不現身(무찰부현신) 나투지 않으시는 곳 없으시네

극락보전 다층석탑
극락보전 앞에 흰 대리석으로 쌓은 다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복련과 앙련, 물결무늬 등이 매우 사실적이고 구름 속을
노니는 용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2중 기단으로 2층의 기단부에 탑신을 얹고 있는 것은 신라, 고려의 전통적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 조형에서는 전혀 다르다. 조선 성종 때 영릉의 원찰로 신륵사를 중창하면서 탑도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비슷한 시기인 1467년(세조 13)에 건립된 원각사터 다층 석탑과 재료나 조각수법이 비슷하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원찰이 되었는데 대웅전이 없으니..해서 찾아보니 이곳에서 신륵사 풍수 등을 볼 수 있었다.
대웅전이 없는 이유는 찾을 수 없었지만 아마도 원찰이 되기 전엔 당연히(?) 없었을테니 그냥 유지한게 아닌가 싶다.
또한 다층석탑의 이유는 팔층 지붕돌 위에 탑몸돌이 있어서 몇층이 더 있는지 알기 힘들어서라고 한다.


향나무인 것 같은데 은해사에서 봤던 것 보다 크진 않지만 정갈한 맛이 있다. 계속 다듬어줄려나...
(사실 시간 순으론 신륵사를 은해사보다 먼저 가봤기 때문에 신륵사때는 그때까지 봤던 향나무 중 제일 큰 느낌이었다. ㄷㄷ)


구룡루
극락보전 맞은 편에 자리하는 구룡루(九龍樓)는 1858년 김병기의 지원으로 중창된 건물이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인데 본래는 1층 앞부분이 트여 있었으나 지금은 벽으로 막아 2층만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보통의 사찰 누각이
누대 밑으로 출입문이 나 있으므로 공간을 충분히 두는 데 비하여 이 구룡루는 누대 밑의 공간이 아주 낮다. 그것은
신륵사 중심사역으로의 출입이 강가 쪽의 정면이 아니라 범종루와 극락보전 오른쪽이므로 출입문으로서의 기능보다는
의식 집행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강조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구룡루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석가부처님이 탄생하실 때
성수를 뿜어 부처님을 목욕시켰다는 아홉 마리 용에 대한 이야기와, 신륵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마리 용의 승천과
관계있을 것으로 보인다.누각 앞뒤로 '구룡루(九龍樓)'와 '봉미산신륵사(鳳尾山神勒寺)' 편액이 각각 걸려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위의 링크된 기사에서 처럼 한국풍수사상에 따라 만들어서 그런 것 같다.



물고기가 없다....왜 풍경들은 수리를 안하는 걸까? 제대로 다 달려있는 절 보기가 정말 힘들다.


신륵사 다층전탑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남아있는 고려 시대의 유일한 전탑으로, 높이는 9.4m이다. 이 탑의 기단부는 화강암을 사용하여
7단의 층단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탑신부는 여러 단의 벽돌을 쌓아서 만들었는데 몸돌에 비해 지붕돌은 매우 간략하게
처리되어 있다. 탑을 구성하고 있는 벽돌에는 이중의 반원 사이에 연주문과 당초문을 조각하였으나 배치가 일정하지 못하며,
신라시대의 전탑이 거의 간격을 두지 않고 벽돌을 쌓은데 비해 이 전탑은 벽돌 사이를 띄워 그 사이에 면토를 발랐다.
상륜부는 전으로 만든 노반 위에 화강암으로 만든 복발, 보개, 보주 등이 얹혀있다. 이 탑의 건립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벽돌의 문양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로 보는 견해가 많은데, 탑 북쪽에 있는 수리비 내용에 의해 조선 영조 2년(1726)에 고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안내문에서 발췌-

극락보전 앞의 탑과 다르게 마무리가 되어 있는 것 같은데 왜 다층인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역시 알흠...


대장각기비
신륵사 대장각을 세운 내력을 새긴 것이다. 목은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고자 보제존자 나옹의 제자들과 함께
발원하여 대장경을 인쇄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해 이곳에 2층의 대장각을 지었다. 비문은 예문관제학인 이숭인이 짓고
글씨는 진현관제학인 권주가 썼다. 뒷면에는 대장경 인쇄와 대장각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신도들의 명단이 적혀있다.
비는 연꽃무늬를 새긴 대석 위에 비몸을 세우고 양옆에 기둥을 댄 다음 그 위에 지붕모양의 개석을 올렸다. 이러한 형식은
고려 말기에 나타난 것으로 조선시대 초기의 비형식에 영향을 주었다.
-안내문에서 발췌-

역시 공포가 꽤 과장된 느낌..이지만 조사당보다는 낫다. 벽과 뚤려있는 것의 차이일까...


강월헌
전탑 가까이에는 강월헌(江月軒)이라는 누각이 있는데 본래 나옹선사가 입적한 후 화장터의 석탑 가까이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1972년의 대홍수로 떠내려가고 이후 탑보다 조금 아래쪽인 지금의 위치에 철근 콘크리트로 다시 세웠다.
강월헌이라는 이름은 나옹의 당호(堂號)로 그를 추모하여 누각을 세운 것이라 생각된다. 이색은 나옹의 비문에서
'보제의 몸은 이미 화장을 하였건만 강물과 달은 지난날과 다름이 없구나. 이제 신륵이 장강에 임하여 있고 석종이 거기에
우뚝 솟아 있어 달이 뜨면 그림자가 강에 거꾸로 걸려있고 물빛은 등불빛 같고, 무럭무럭 타오르는 향기만 그 속에 엉겼으니
이른바 강월헌이로다. 비록 한없는 세월이 흐른다 해도 마치 보제가 살아있는 것만 같구나'하고 읊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그래도 기존의 건물들을 해치지 않게 지은 티가 좀 나는 듯하다. 바닥 소재야 콘크리트긴 하지만...
같은 소재라 하더라도 너무 튀는 경우가 많아서..30년의 세월이 그렇게 만들어 준걸지도 모르지만 ㅎㅎ


강월헌 옆의 삼층석탑은 누구에 의해 조성됐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흠흠....



공민왕도 새를 보고 읇으셨건만 나도 그래야 할까 보다. ㄷㄷ


하여튼 절과 강변을 같이 볼 수 있어서 좋다. 찾아갈 때는 절만을 생각했기에 더 특별했달까..


강월헌에서 바라본 반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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