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산] 탑영제 저수지+금당사+마이산 설화 by 타누키



남쪽과 북쪽 모두 저수지가 있는데 남쪽 저수지는 탑영제라고 불린다.


추억의 오리보트+거북선...거북선은 처음보네 ㅡㅡ;


저 멀리 보이는 절...지도로 검색해보니 나봉암이 아닐까...싶다.


다 내려와 있는 금당사..금당사 부지가 마이산에 맞먹어 마이산이 금당사처럼 보이기도 한다.
현재 열심히 금칠 중인데 과거의 사진은 금칠이 없었고 주변도 허허벌판에 가까웠는데 상당히 호화로워졌다.

고구려의 보덕(普德) 스님은 보장왕이 중국의 도교에 심취하여 불교를 신봉하지 않자, 650년에 제자 11명과 함께 완산주(完山州)로
내려와 백제지역에 불교를 포교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제자 중 적멸(寂滅)ㆍ의융(義融)은 임실에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數)는
문경에 대승사(大乘寺)를,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은 전주에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淨)은 정읍에 유마사(維摩寺)
를, 사대(四大)는 진안에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단양에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창건하였고
무상(無上)은 그의 제자 금취(金趣)와 함께 진안에 세운 것이 바로 금당사(金堂寺)이다.

금당사는 1천300년의 전통을 지닌 백제의 고찰로서 호남 동부권의 대가람일 뿐만 아니라 고려말에는 나옹화상이 수행하며 도를
이룬 곳으로도 유명하여, 금당사 옛터인 천연동굴은 나옹굴(懶翁窟)이라 불려지고 있다.

그러나 금당사의 가장 큰 역사적 의의는 일제의 주권침탈에 맞서 싸우던 호남지역 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역할한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주지 대완(大完) 스님은 몸소 격문을 새겨 각지에 배포하고 최익현(崔益鉉)과 동맹록을 작성하는 등 호남
항일의병창의(湖南抗日義兵倡義)의 뜻을 펼쳤는데, 금당사에서 행해진 일련의 항일운동은 위로는 동학농민운동을 잇고 아래로는
일제하에서 맹렬히 전개된 소작항쟁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수난을 겪어 사찰은 피폐화되었지만, 옛 고찰의
면모를 일신하는 대대적인 중창이 이어지고 있어 짙은 안개 속에 뚜렷이 떠오르는 마이산의 쌍봉처럼 백제의 고찰이요, 호남
항일운동의 진원지인 금당사의 역사는 새롭게 펼쳐지고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금칠이 자꾸 눈에 밟히지만 뭐...ㅡㅡ;;


아미타삼존불상
금당사의 주존불상(主尊佛像)인 목조아미타삼존불좌상은 하나의 은행나무로 조각된 국내 유일한 형태의 목불이다.
삼존 모두 목조로서 금강산에서 섬진강으로 운반된 은행나무 또는 둥구나무를 재료로 조성하였으며, 제작자는 조선 초기에
새 왕조의 창업을 축하하기 위해 중국인이 조성한 것이라 전한다. 전반적으로 방형의 상호에 미미함 양감, 온화한 얼굴표정
절제된 이목구비의 인상 등에서 17세기 후반기(1675년)에 제작된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앙 본존불은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취한 아미타불상(阿彌陀佛像)으로, 네모지고 평평한 얼굴, 당당한 체구에 움츠린
어깨, 경직된 양감, 도식적이고 단순화된 법의의 표현 등으로 조선조 후기의 불상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는 17세기
수다사 아미타불, 진도 쌍계사 대웅전 석가불, 범어사 삼존불 등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17세기 중후반기 불상의 정형화된
양상이다. 좌우 관음(觀音)ㆍ세지(勢地)의 협시불 역시 복잡한 보관이(寶冠)나 가슴의 영락(瓔珞)장식, 두 손에 들고 있는
연꽃가지 등의 장식적 요소를 제외하면 본존불과 흡사한 양식이다.
현재 지방 유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높이는 165cm, 가로 230cm이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대웅보전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이 이상하지만...ㅡㅡ;


미쿡의 불자분이 시주하셨다는....워..


금당사 서쪽의 산중턱에 자리한 고금당터는 1675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오기 전 본래 금당사의 옛 터로, 기와를 얹은 천연동굴이다.
속설에 의하면 이 동굴은 고려 말 나옹스님이 머물며 도를 이룬 곳이라 하여 나옹암(懶翁庵) 또는 나옹굴(懶翁窟)이라 부르며
마이산의 비경을 조망할 수 있다. 동굴은 남향으로 뚫려 실제 수도하면서 거주할 수 있으며, 굴 전체의 규모도 제법 넓고 커서
법당으로 사용할 만하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뒤쪽의 터가 고금당터라고 한다. 이 불상 등도 과거자료사진에는 금칠이 없었는데...


바깥에선 부모들이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두 아이가 극명히 대비를 이루고 있었고
부모들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사진'감'이 되는 아이..


안되는 아이 ㅡㅡ;; 같이 모아놓고 사진찍을때는 좀 더 차이가 극명했었다. 흙흙..


오층석탑
고려후기에 세워진 금당사 오층석탑은 경내의 연지(蓮池) 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다. 원래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오층석탑이지만
일제강점기에 도굴로 인해 변형되어, 현재의 모습은 기단부와 상륜부가 결실된 불완전한 형태이다. 전라도지역에서 볼 수 있는
소형석탑의 전형적 모습을 갖추고 있으며, 재료는 화강암이 아닌 점판암(粘板巖)으로 조성된 특이한 모습이다.

기단부는 가운데 중석이 없어져 다른 돌로 대신하였으며, 그 상부로 5층의 탑신(塔身)을 쌓아 올렸다. 지붕돌은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꼭대기에 놓인 머리장식은 후에 보충한 것으로 전체가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연못 한가운데 놓여 있어
주위의 미륵불입상과 함께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원래 연못 가운데에 있었으나 습기 등으로 인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옮겼다고 한다.


마이산 설화-마이산이 된 산신부부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천상에서 쫓겨난 산신 부부가 이 세상에 내려와 살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낸 뒤, 드디어 천상세계로 돌아와도 좋다는 허락을 받게 되었다.

이때 남편 산신이 말하였다.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을 누가 보면 절대 안 되니 밤에 떠나기로 합시다.” 그러나 여신은 밤에 떠나는
것은 무서우니 새벽에 떠나자고 남편을 설득하였다. 이에 남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이 되었지만 여신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오랜 속죄의 날들이 허사가 될세라 불안한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이튿날 새벽 날이 밝자마자 산신 부부는 승천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새벽에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여인이 놀라 비명을 지르는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신은 여신으로부터 두 아이를 빼앗고 발로 차 버린 뒤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우뚝 서 있게
되었다고 한다.

전설을 뒷받침하는 냥, 마이산은 진안의 북쪽에서 바라보면 동편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으며, 서편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고개를 떨군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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