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곡사] 범종각+오층석탑+심검당+대적광전 by 타누키



범종각
극락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 편에 범종각이 있다. 1996년에 건립한 '十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누하(樓下)는 콘크리트 구조로
만들어 불교 용품과 서적을 판매하는 매점으로 활용하고 있다. 누 위에는 사방에 석조 난간을 돌렸고 원형초석을 놓은 위에
기둥을 세워 목조 건물을 올렸다. 내외3출목(내외7포)의 다포식 건축으로 살미의 쇠서는 앙서형으로 길게 뻗어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十자'형 평면의 각 면에 합각부가 돌출해 있으며, 지붕의 정점에는 3단의 석재를 겹쳐 올린 절병통을 두었다.
조선시대 후기 건축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며 '十자'형의 평면과 그에 따른 지붕형태의 변화, 3출목의 공포, 길게 뻗은 살미
기둥과 창방 사이의 낙양각 등으로 범종각은 변화 있고 화려한 외관을 보여준다.
내부에는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의 사보(四寶)를 두었다. 모두 근래에 조영된 것이다. 그 중 범종은 범종각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벌어지다 중간 부분부터 수직으로 내려오고 구연부가 약간 오므라든 종신(鐘身)은 전형적인 한국
종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종신에 '佛紀三0二0甲寅年秋 麻谷寺千佛殿 住持楞嚴'이라고 쓴 명문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범종각이면서 전체 사찰에 맞추어서 짓는게 낫지 새건물이라고 크게 짓는 것은 않좋아보인다.


마당...연등을 세울려고 열심히 준비중이다.


오층석탑
대광보전 앞마당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 탑은 고려 말에 원나라를 통해 유입된 라마교 탑의 영향을 받은 청동제 상륜부를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석탑 중에는 특이한 조형을 이루고 있다. 기단부는 폭에 비해 높이가 높고, 1층 탑신부의 폭을 기단에 비해 약간
줄이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체감은 매우 적은 편이다. 체감이 적고 너비에 비해 높은 고준한 비례, 세부적인 조각 형태 등은
이전의 석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석탑의 새로운 경향을 반영하는 것이며, 기단부는 백제적인 분위기의 지방색을 보이고, 상륜은
고려 말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한 새로운 형식을 반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삼국시대 이래 한국 석탑의 전통과 백제적인 지방색
그리고 원나라와의 교류 관계 등, 고려시대 말기 석탑의 여러 가지 새로운 경향 중의 한 특색을 보여주는 석탑이라 할 수 있다.

임진왜란 때 석탑 안의 유물은 도난을 당하였으며, 1972년 해체수리를 하면서 동제 향로와 문고리가 발견된 바 있다. 1984년에
보물 제799호로 지정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탑의 전체 높이는 8.67m이고 청석(靑石)을 이용해 만들었다. 2층의 기단, 5층의
탑신, 그리고 청동제 상륜부로 구성되어 있다.

기단은 상하 2층으로 지대석과 하대 및 상대로 구성된다. 너비에 비해 높이가 높고 체감은 거의 없다. 이와 함께 여러 개의 돌을
쌓아올려 만든 기단의 기본적인 조형은 백제계 석탑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지대석은 두 단으로 하단은 지하에 매몰되어 있으며
상단은 단면을 곡선형으로 하였고, 각 면에 2개씩의 안상을 새겼다. 안상의 모습은 삼국시대에서 남북국시대 신라에 이르는
전형적인 형태를 벗어나 고려시대에 많이 볼 수 있는 복잡한 형태이다. 상하층 기단의 하대석과 갑석은 장대석으로 만들었고
상층기단의 중대에는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는데, 단면이 반원형을 이루는 수직의 쇠시리를 두어 형태를 강조하였다. 상층기단의
갑석은 아래를 사절(斜切)함으로서 중대와의 연결을 부드럽게 하였다. 갑석 상부에는 두 단의 탑신 괴임을 두었다.

각층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한 개의 별석(別石)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층의 탑신석은 모두 모서리에 우주(隅柱)를 새겼다.
1층과 2층 탑신은 모서리를 한 번 접었는데, 다른 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성이다. 2층을 제외한 1층과 3층 이상의 탑신에는
우주 안쪽으로 상하좌우에 상하 인방과 벽선과 같은 방형 윤곽을 새겼다. 1층 탑신은 남측면에만 문비가 있음을 나타내는
자물쇠를 돋을새김 했는데, 자물쇠 빗장 중앙과 양단의 장식조각이 돋보인다. 2층 탑신은 네 면에 사방불을 양각했다.

옥개석은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아래에 매우 낮게 두 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3층 이상에서는 그나마 옥개받침을 더욱 간략하게
새겼다. 처마부는 전체가 완연한 곡선을 이루도록 하였는데, 중앙부에 직선이 있는 신라계 석탑과는 다른 모습이다. 추녀마루를
돋을새김으로 강조하였고, 그 끝에 볼록한 부분을 두었다. 처마의 모서리와 추녀마루 끝에 장식조각을 베풀었는데,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모습이다. 옥개석의 추녀부 아래에는 작은 구멍 또는 철물이 박혀있는데, 풍탁을 끼우기 위한 것으로 현재
5층 옥개에만 하나의 풍탁이 남아있을 뿐이다. 5층 옥개 상부에는 상륜부의 하부 평면에 맞추어 亞자형 평면의 받침재를 두고
그 위에 청동제 상륜을 올렸다. 상륜은 고려 말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온 라마교의 탑 형식을 따른 것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석탑 형식에 라마탑이 상륜으로 결합된 것이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많이 파손됐지만...


사방불이 꽤 온전하게 남아 잘 볼 수 있었다.


새로 얹은 건가 싶었는데 원래 있었던거군..


심검당과 고방
심검당은 대광보전 앞마당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ㄷ자'형 평면의 요사이다. 승려들의 생활공간으로 대광보전의 노전(爐殿)
이면서 대방(大房)의 역할을 하는 건물이다.대광보전 앞마당으로 '一자'형의 평면을 이루면서 대방이 있다. 대방의 전면, 즉
대광보전 앞마당 쪽에는 툇마루가 있었으나 현재는 툇마루를 없앴다. 대방 북쪽에는 불단을 조성하고 불화를 모신 1간의 인법당
(因法堂)이 있으며, 남쪽 끝에는 넓은 부엌을 두었다. 이 '一자'형의 건물 동편으로 남쪽과 북쪽에 각각 익사를 두어
전체가 'ㄷ자'형을 이루도록 했는데, 생활공간의 마당이 대광보전 앞마당에서는 가려지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다. 양 익사에는
각각 크고 작은 방을 두었다. 마당 쪽 정면만 몰익공식의 초각을 한 초익공식으로 하여 격을 높였고, 나머지 부분은 민도리집
구조이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북쪽 익사 끝은 맞배, 남쪽 익사 끝은 팔작지붕으로 처리했다. 심검당 북편에는 굴뚝이 있고
다시 그 북쪽 편에 장독대가 있다. 굴뚝은 흙과 기와를 쌓아 만들었는데 매우 큰 규모로 아래에 비해 상부를 많이 줄였고, 상부에
기와지붕을 올렸다. 굴뚝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크고 대담한 조형으로 마곡사 요사 영역 조형의 특성을 이루고 있다.
마당 쪽 전면에 ‘泰華山麻谷寺’, ‘麻谷寺’, ‘尋劍堂’이라 쓴 세 개의 현판이 있다. ‘尋劍堂’이라 쓴 현판은 정조 연간에 청백리로
유명했던 송하(松下) 조윤형(曺允亨)이 쓴 것이며, ‘麻谷寺’라 쓴 현판은 근대의 서화가인 해강(海剛) 김규진(金圭鎭, 1868~1933년)
이 쓴 것이다. 심검당은 조선 후기의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으나 정확한 연혁은 알 수 없다. 다만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1797년
(정조 21)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심검당 안에 걸린 記文 편액에 1856(철종 7) 2월에 중수된 사실과 1909년에 번와공사가
있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심검당 북쪽 뒤편으로는 담장으로 구획된 영역 속에 누각 형식의 고방이 있다. 누마루 위에 곡물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누 아래까지 막아 창고로 사용하고 있음이 특징이다. 도리통 4간, 양통 1간 규모의 민도리집으로
홑처마에 맞배기와지붕이며, 박공부는 풍판을 달지 않고 개방시켜 가구가 노출되도록 하였다. 가구는 3량가로 누 아래의 기둥은
원주인 반면 누 위의 기둥은 방주로 하여 변화를 주었다. 기둥과 보는 휜 부재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전면에는 판문을 달아
출입할 수 있도록 하고 나머지는 모두 판벽으로 막아 통풍에 유리하도록 하였다. 건물 안쪽이 아닌 바깥 전면에 통나무를 이용한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대적광전
중심선상에 동자주를 두어 이 동자주와 후면 고주 상부에 종량을 걸었다. 고주 상부와 동자주 상부는 역시 익공식 짜임을 두었다.
이와 달리 후면에만 내주를 둔 부분에서는 내주를 고주 형식으로 하여 그 중간에 대들보와 툇보를 두고 대들보 위에 동자주를 세워
고주와의 사이에 종량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내주를 세우지 않은 부분에서는 전면과 후면 주심포 위에 긴 대들보를 걸었다.

이상 대광보전은 기둥의 배열과 보를 거는 방법에 있어 네 개의 보방향 기둥열 가구를 모두 다르게 했다. 이처럼 하나의 건물에
복잡하고 다양한 가구법을 구사한 예는 다른 건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건물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으며, 그것은 대광보전을
중건할 때 마곡사가 처했던 상황과 관련해 복합적인 평면을 구성할 필요가 있었고, 그러한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둥 배열에
변화를 준데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모서리간의 평면을 장방형으로 하면서 팔작지붕을 구성하고자 했기 때문에 측면의 주심포에서는 내부의 고주 또는 그 위에 놓인
대들보 위로 퇴보 또는 충량을 걸었다. 그리고 충량 위에 동자기둥을 세워 외기도리를 받도록 하였다. 한편 내부의 모서리에 놓인
귀기둥 상부는 대들보와 양쪽에서 오는 퇴보 또는 충량으로 인해 그 결구가 매우 복잡한 모습으로 되어 있다.

한편 대광보전의 보는 매우 심하게 휜 부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기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듯
휜 부재를 사용한 것은 목재의 수급이 그만큼 어려웠던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팔작지붕은 별다른 특성이 없는
조선시대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처마는 네 면 모두 겹처마이며, 합각부는 합각널을 사용해 막았다.

바닥은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다. 한편 마루 위에는 참나무로 만든 삿자리가 깔려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한 앉은뱅이가
마곡사에 찾아와 불구를 면하게 해달라고 비로자나불에게 백일기도를 드리면서 정성을 다해 삿자리를 짰다고 한다. 기도가 끝날
무렵 삿자리가 완성되었고 앉은뱅이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서서 법당 문을 걸어 나갔다고 한다. 천장 전체는 후불벽 뒤쪽의 1×3
간을 제외한 전체를 우물천장으로 꾸몄다. 특히 중앙부의 3×1간은 소란대를 돌려 우물천장의 장엄을 한층 더했다.

정면의 모든 간에는 거의 동일한 형식의 삼분합문을 달았다. 그러나 그 형식은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우선 어간의 창호는 아래에
한 단의 궁창부를 둔 반면 어간을 제외한 네 간에는 두 단의 궁창부를 두어 변화를 주었다. 어간의 궁창부 구성은 협간들에 비해
약간 낮게 되었는데, 이로 인해 살대를 베푼 부분이 높아지는 변화가 생겼다. 또한 살대의 구성에 있어서도 어간은 협간과 달리
정자살과 빗살을 결합한 살대로 구성하였다. 또한 살대의 간격도 중앙의 것을 양쪽의 것보다 좁게 하여 강조하였는데, 중앙 문짝의
살대 간격을 넓게 양쪽 문짝의살대 간격을 좁게 한 협간과는 반대이다. 그만큼 어간을 강조하기 위한 배려라 할 수 있다. 어간을
제외한 협간의 창호는 모두 동일하다. 그러나 삼분합으로 구성된 각 간의 창호는 중앙과 그 양측 문짝의 살대에 변화를 주었다.
중앙의 문짝은 소슬빗꽃살로 살대의 간격을 양측의 문짝에 비해 크게 했다. 양측의 것은 빗꽃살이다.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에 의하면 조선 1782년(정조 6)에 마곡사에 큰 화재가 발생해 대법당을 비롯한 1,050여 間의 건물이
소실되었다고 한다. 그 후 霽峰 體奎를 化主로 마곡사의 중창이 시작되었고, 화재가 난 3년 후인 1785년(정조 9)에 이르러
大法堂을 개건하기 시작해 1788년(정조 12)에 이르러 개건과 불화의 단청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현재 대광보전 안에 보관되고
있는 '永世不忘祝願'와 '忠淸右道公州判地西嶺泰華山麻谷寺大光寶殿重創記' 역시 대고아보전이 1785년에 개건되었음을
보여준다. '永世不忘祝願'는 1785년에 관찰사 겸 순찰사인 沈豊이 법당 중건을 위해 시주한 공덕을 기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며
법당(法堂)은 곧 대광보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忠淸右道公州判地西嶺泰華山麻谷寺大光寶殿重創記' 역시 1785년에
작성된 것으로 대광보전이라는 건물명과 그것이 중창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후불탱화의 화기(畵記)에도 불화가 1788년에
조성되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한편 현판도 표암 강세황이 쓴 것으로 그의 생몰연대와 맞아 떨어진다. 건축양식에 있어서도
대광보전은 초제공, 이제공, 삼제공, 사익공, 오운공으로 이어지는 법식화된 공포의 구성, 갖가지 조각을 통한 화려한 장엄, 휜
부재를 활용하고 있는 점 등 18세기 불전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따라서 대광보전은 '泰華山麻谷寺事蹟立案'의 기록처럼 霽峰 體奎가 1785년에 개건하기 시작하였고, 1788년에 이르러 완공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대광보전 안의 기문(記文)으로 보아 대광보전 자체는 1785년에 완성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3년 정도를 기다려
단청을 입히고 불화를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적광전 현판
정면 어간에 걸려 있는 ‘大光寶殿’이라 쓴 현판은 豹菴 姜世晃(1712~1791년)이 쓴 것으로 현판 한쪽 모퉁이에 ‘豹菴’이라 쓴
낙관이 찍혀 있다. 약간 흘림체로 쓴 글씨는 유려하면서 힘이 잇는 모습이다. 강세황은 마곡사에서 멀지 않은 풍세에
그의 鄕邸가 있었으므로 마곡사와 어떠한 인연을 지니고 있었던 듯하다. 대광보전이 1788년에 완성되었으므로 현판도
이때 씌워진 것이라 한다면 강세황의 나이가 76세로 글체가 최고조에 달했던 말년에 쓴 것이 된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대적광전 비로자나불좌상
불단에는 비로자나부처님이 모셔져 있고 뒤로는 영상회상탱이 걸려 있다. 본존인 비로자나불 좌상은 결가부좌를 하고 양 손을
가슴에 모으고 왼손의 검지를 세우고 오른손 검지로 덮은 지권인을 하고 있다. 상호는 두 볼이 풍만하고 정상의 계주(繫珠) 없이
중앙부의 반달형으로 생긴 계주만을 표현하였다. 양 어깨가 건장한 편이며, 앉은 자세는 다리 부분이 짧은 반면 상체, 특히 허리가
길다. 수인(手印)도 오른손 검지가 치켜세운 왼손의 검지를 덮어 누르고 있어 독특하다.

이 비로자나불의 조성연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다. 약간 긴 듯한 얼굴과 풍만한 두 볼, 곱게 표현된 양손과
옷자락이 낙산사 보살상, 서산 보원사지에서 출토된 철불, 청양 장곡사의 금동약사여래상과 같은 고려시대 불상과 유사하다고
보는 견해이다. 반면에 풍만한 두 볼의 모습이 상원사 문수동자상(1446년경)과 유사하며 손 모양은 광덕사 천불전의 비로자나불상
(1457년경)과 같다고 보아 조선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는 견해이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인이 독특한....만화같은 인을 하고 있어 재밌다.


대적광전 밖의 그림들...노루? 사슴을 타고 다니는 그림이 있어 재밌다. 중국인을 찾아가는 건지 맞이하는지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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