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악단] 왕실의 기도처 by 타누키


중악단으로 가는길...안내문에는 신원사의 산신각이라고 되어 있는데 흠흠...


오층석탑
중악단 앞쪽 넓은 마당의 한쪽 편에 오층석탑 한 기가 있다. 이곳이 원래 신원사의 중심영역이었다고 한다. 석탑은
이중기단을 가지고 있으며, 현재 4층이나 원래는 5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석탑의 형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1975년 12월에 해체 수리한 바 있는데, 하층 기단부에서 사리구와 함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 유물은 청색 사리병, 개원통보(開元通寶) 1개, 개원중보(開元重寶) 2개, 함원통보, 황송통보
토기호 1개 등으로 고려시대의 것이다. 석탑 서쪽에는 배례석이 있다.

기단은 석판을 이용한 지대석 위에 올려져 있다. 이중기단으로 하층은 하대석, 면석, 갑석으로 구성된다. 하대석은 상면에
쇠시리가 없는 단순한 판석 형태이다. 면석은 네 장의 판석으로 만들었는데, 탱주 하나와 우주를 양각해 각 면은 두 간으로
나누었다. 탱주와 우주 사이의 면에는 안상을 새겼는데, 면의 넓이에 비해 안상의 크기가 작은 편이다. 안상 안쪽에는
안상 하면에서 올라온 꽃이 피어오른 모습을 조각했다. 갑석은 상면이 바깥을 향해 약간 경사진 구배를 이루고 있으며
그 위에 쇠시리를 두어 상층기단의 면석을 받치고 있다. 쇠시리는 1/4원을 이루는데, 그 크기가 비교적 큰 편이다.

상층기단의 면석 역시 네 장의 석판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면에 탱주 하나를 조각하고 모서리에 우주를 양각해서 각 면을
두 간으로 나누었다. 그러나 하층기단과 달리 면석에는 전혀 조각을 베풀지 않았다. 갑석 상면은 바깥을 향해 약간 경사를
이루며,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고임을 이루도록 하였다. 쇠시리는 하의 것이 매우 큰 1/4원을 이루는 반면 상단의 것은
그 높이가 매우 낮아 거의 인식되지 않는 정도이다.

탑신은 하나의 석재로 모서리에 우주만 양각한 모습이다. 1~4층의 탑신이 동일한데, 2층 탑신은 1층 탑신에 비해 너비는
약간만 줄이고, 높이는 1/3 이하로 많이 줄였다. 2층 탑신의 높이를 1층에 비해 많이 줄여 놓음으로서 탑 전체가 안정감 있는
비례를 이루도록 하였다. 3층 이상은 2층에 비해 높이와 폭을 조금씩만 줄였다. 4층 탑신이 3층 탑신에 비해 폭이
많이 줄어든 모습인데, 이로 미루어 현재 4층 탑신은 원래 5층 탑신이었고, 원래의 4층 탑신이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옥개석 역시 하나의 석재로 이루어졌다. 옥개석 하부의 층급받침은 4단으로 각 단의 높이가 비교적 낮은 편이어서 약화된
모습을 보이며, 물끊기는 두지 않았다. 처마 끝은 하면이 수평의 직선, 상면은 수평의 직선 양 쪽 끝을 완연한 곡선으로
반곡시켰는데, 솟아 올라간 높이가 낮은 편이다. 이와 함께 처마 끝의 두께도 얇은 편인데, 이는 신라계 석탑의 조형을
지니면서도 백제계 석탑의 모습을 약간 지닌 것이라 할 수 있다. 옥개석 상면의 구배는 완만한 편이며, 그 위에 한 단의
쇠시리를 두어 상층의 탑신을 받치도록 하였다. 상륜부는 모두 소실되어 하나의 부재도 남아있지 않다.

신라계 석탑의 형식을 잘 간직한 석탑이라 할 수 있으나 우주와 탱주의 조각에 양감(量感)이 매우 적고, 하층 기단
면석의 안상 속에 꽃이 조각된 모습, 기단 갑석 상면의 쇠시리가 한 단으로 약화되거나 매우 높은 1/4원을 이룬 점
층급받침이 약화된 점 등은 신라계 석탑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석탑은 고려시대 전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층의 탑신과 옥개석 및 상륜이 소실되었으나
전반적으로 적당하고 안정감 있는 비례를 지닌 오층석탑이라고 할 수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이 곳이 원래 신원사의 중심이었다니 흠흠....왕실 기도처로서 원래의 모습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ㅎㅎ


중악단 입구 뒤편의 편액....설명이 없으니 흠흠...들어가자마자 좌우에 선원처럼 거처를 마련하고 있는 것 같다.


벽에 흥미로운 장식도 보이고...왕실식이라 그런 것 같다. 이정도로 절에서 장식한 것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중악단
중악단은 신원사의 동쪽에 별도의 영역을 형성하며 위치하고 있다. 묘향산의 상악단, 지리산의 하악단과 함께 왕실의
기도처로서 중악단은 조선 고종 16년(1879년)에 설치하였다. 중악단은 중악전(中嶽殿) 또는 계룡단(鷄龍壇)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초 무학대사의 꿈에 산신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태조 이성계가 창건을 명했다고 한다.
효종 2년(1651년)에 이르러 제단이 폐지되었다가 고종 16년(1879년)에 명성왕후의 명에 의해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왕조의 몰락과 함께 왕실 주도의 제사 의식은 중단되었고, 현재는 신원사에서 불교식으로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중악단은 서남향으로 신원사와는 좌향을 다르게 하였다. 신원사가 계룡산의 연천봉을 주산으로 삼은 반면 중악단은 계룡산
정상인 천왕봉을 주산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중악단은 대문간채와 중문간채, 중악단 본전을 일직선 축선상에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일직선 축과 좌우대칭에 의한 배치로 인해 단묘 건축으로서의 엄숙함과 건물간의 위계를 느낄 수 있다.

대문간채는 중앙 한 간의 지붕을 높게 한 솟을삼문 형식으로 전면은 7간이다. 중앙의 3간을 문으로 하였고, 좌우의 2간은
관리를 위한 건물로 뒤쪽으로 꺾여 2간이 연장된다. 대문을 들어서면 대문과 익사 및 담장으로 둘러싸인 마당이며
마당 뒤쪽에는 다시 중문을 두었다. 중문은 정면 5간으로 중앙의 3간에 문을 설치했으며, 좌우에 온돌방 1간씩을 들였다.
중문을 들어서면 담장으로 둘러싸인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뒤편에 중앙단 본전이 있다.

중악단 본전은 고종 16년(1879년) 단주화상(丹珠和尙)이 중건하였으며, 명성황후도 이곳에 와서 친히 기도를 올린 바
있다고 전해진다. 정면 어간에는 흰 바탕에 검은 색으로 ‘中嶽壇’이라 쓴 현판을 걸었다. 그 한편에 ‘辛卯直指御史 李重夏書’라는
기명이 있다. 신묘는 고종 28년(1891년)이다. 왕실에서 이중하를 내려보내 직접 편액을 쓰게 한 것이다.
내부에는 목판에 음각한 ‘懸板謄文’이 있는데, 고종 29년(1892년)에 쓴 것이다.

도리통 3간, 양통 3간으로 정면 3간에는 분합문을 달아 개방시켰다. 좌우측에는 전퇴에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머지 측면과 후면은 모두 벽을 들였는데, 목조의 판벽임이 특징이다. 내부는 통간(通間)으로 어간의
후벽에 의지해 1간 너비의 불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감실을 설치해 산신탱을 모셨다.

기단과 계단은 장대석을 이용해 만들었다. 정면에는 3개의 계단을 두었는데, 중앙의 계단 앞으로 답도를 마련했다. 초석
역시 다듬돌 초석으로 방형의 초반 위에 운두가 높은 주좌를 새긴 원형초석으로서 주좌 좌우에는 고막이돌과 연결시키기 위한
인방받침까지 갖추고 있다. 왕실과 연관된 건물로서 격식을 갖추기 위해 궁실건축의 기법이 적용되고 있는 모습이다.

기둥은 원주로서 약간의 배흘림이 있으나 귀솟음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돌렸다. 공포는
주심포와 함께 정면과 후면 각 주간(柱間)에는 2구, 양 측면 주간에는 각 1구씩의 주간포를 배치한 다포식이다. 외3내4출목
즉 외7내9포의 구성이다. 상하 살미를 서로 맞닿도록 하였고, 초제공, 이제공, 삼제공, 사익공, 오운공의 구성으로서
초제공에서 사익공에 이르는 쇠서의 끝단을 맞추었다. 초제공에서 삼제공에 이르는 살미의 앙서 위에는 연꽃을 새기고
사익공의 수서 아래도 연꽃을 새겨 장엄했다. 조선시대 후기 다포식 공포 구성의 일반적인 형식을 따른 것이다.

그러나 출목 사이의 간격이 비교적 넓은 편이어서 살미의 길이가 긴 편에 속하고 초각된 살미 끝이 커서 무거워 보일 뿐
아니라 제공의 초각은 하면에 직선이 보이는 등 경직된 느낌이 강하다. 이것은 조선시대 후기에서도 시대가 많이 떨어지는
모습이다. 살미 내측은 각 단 살미에 연봉과 연화를 새겨 운궁형으로 화려하게 꾸몄다. 보머리는 외부로 노출되어
있지 않으며, 주심포와 주간포에 관계없이 봉취형으로 초각한 운공을 두었다.

첨차는 소첨과 대첨을 사용하였으며, 단부를 직절, 하부를 사절한 교두형이다. 주심에는 평방 위에서 주심도리받침장여까지
여러 단의 판재를 겹쳐서 올렸다. 언뜻 일반적인 방법으로 첨차를 둔 것처럼 보이나 첨차는 이 판재 위에 단청으로 표현된 것이다.
주심첨차를 두고 그 사이를 포벽으로 구성하는 일반적인 방법에서 벗어난 새로운 방법으로 중악단이 지닌 건축적 특성이다.

가구는 무고주5량가이다. 대들보는 약간 휜 부분이 있으나 그것은 단면이 충분하지 않은 목재를 사용한데 따른 것으로
직적형으로 치목하고자 하는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양 측면 주심포 위에서는 대들보로 만곡된 형태의 충량을 걸었고
충량머리에는 용두를 새겼다. 동자기둥은 방주 형식이며, 종보보다 약간 아래에 우물천장을 설치했다.

지붕은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합각에는 기와를 쌓아 무늬를 만들어 치장했다. 추녀마루에는 7개의 잡상을 올렸고
내림마루 끝과 용마루 양단 부분에는 용두를 올려 장식했다. 용두는 용의 머리 형상만 윤곽으로 갖추었을 뿐 표면을
아무런 조각 없이 매끈한 면으로 처리했다. 건물 내외는 단청을 하여 장엄을 베풀었는데 탈락이 심한 편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다. 정면의 창호는 궁창부를 한 단 둔 위에 교살을 베푼 동일한 형식이다.

어간 후벽에 모신 산신탱은 화기를 확인할 수 없으나 중악단과 함께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중앙에 산신의 모습을 크게
그려 놓았는데, 다른 산신탱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구도이다. 우측의 호랑이는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앞다리를
쭉 편 체 앉아있는 모습이다. 얼굴을 치켜 올린 표현이 특이하다. 좌측에는 시자들이 있다. 우측 하단에는 바위와 물
좌측 상단에는 괴석과 소나무, 화초와 새를 그렸다. 화조도와 같은 구성으로 빛이 많이 바랬으나 매우 섬세한 필치를 보이고 있다.

산신탱은 감실을 만들어 모셨다. 전면에는 아자살의 네짝 미닫이가 있으며, 그 하부에 머름을 들였다. 상부에는
아자형 평면의 닫집이 있는데, 매우 간단한 구성이나 단청이 뛰어나다. 한편 중악단 주변의 담장과 부속건물의 화방벽은
기와를 이용한 꽃담을 구성하였는데, 소담스러운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아래는 돌각담으로 구성하고 상부에 지붕을
덮은 구조인데, 담장 상부 지붕의 아래에 기와와 전돌을 이용해 상하 두 줄의 수평띠를 만들었고, 그 속에 곡선을
이용한 무늬를 베풀었다. 그 중간 중간에는 길상무늬를 써 넣었다.

건물과 내부의 산신탱과 감실은 모두 궁실 건축에서 볼 수 있는 구성을 하고 있다. 왕실과 관련된 시설이기 때문에
나타나는 특성이다. 특히 기단과 초석 등은 궁실건축에서나 볼 수 있는 구성이다. 반면에 공포의 초각 형식은 사찰건축의
특성과 함께 지방색을 강하게 보여준다. 결국 중악단은 조선말 궁실건축과 사찰건축, 그리고 지방색이 결합된 건축이라는
점에서 강한 특성을 지닌 건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중악단이라 중자 모양인가 ㅡㅡ;;


양쪽벽에 새겨진 한자들....인데 구름이라던지 번개 등 자연에 대한 한자 인 것 같은데..흠흠..








사찰은 불교인이 아니라 거의 잘 안들어가는데 이곳은 좀 다른 의미니....(그렇다고 무속인도 아니지만 ㅡㅡㅋ)
다른 분들 들어가시길레 나도 따라서 한번 들어가 봤다. 무엇보다도 어떤 그림이 그려져 있을까 궁금해서...

중악단 산신...역시 프린트한 그림이긴 하지만 호랑이가 참 특이하게 그려져 있다.
시기를 확인 할 수는 없지만 원본은 아마 중악단과 비슷하지 않을까 한다니..오오..


무당(?)들의 모습일까 ㅡㅡ?? 그런 역사가 있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계룡산 이쪽편에는
무당집들이 많다. 웬지 더 눈에 잘 띈달까...





중악단 편액
위도상 상부에 있다 하여 묘향산의 상악단과 하부에 있다 하여 지리산의 하악단과 더불어 대산신(大山神) 삼단(三壇)의
중앙으로 고종(高宗)때 직지어사(直旨御史) 이종하를 왕실에서 직접 내려보내 '중악단'이라 편액을 설치하였다. 예부터
내려오던 기우재 터인 '중악단'은 산신 기도처로 국가의 위기 때마다 큰 몫을 하여 왔다. 사기에 의하면, 이태조가
등극하기 전에는 명산을 두루다니며 산신기도를 하여 오다가 조선을 개국하고 즉위 3년에 무학선사의 선몽에 의하여
계룡산신을 모시는 제단을 성역화하고 그 후에 누각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또한, 그 후로 산신기수를 올리던 유일한 누각으로
내려오다 고종16년(1879)에 단주(丹珠) 화상이 중수하여 명성황후도 친히 와서 기도를 올린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
-http://www.koreatemple.net/에서 발췌-


중국 송나라에서 전래되어 조선시대에 성행하였던 잡상은 3마리에서부터 11마리까지 3, 5, 7, 11의 홀수로 앉혀져 있으며
『상와도』라는 책에서 추녀마루 끝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대당사부大唐師父는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사람의 얼굴 모습으로 삿갓을 쓰고 있으며, 그 다음으로는 손행자(孫行者, 손오공)
저팔계, 사화상(獅畵像, 사오정)이 있습니다. 그 뒤로는 이귀박二鬼朴으로 허리의 앞과 뒤에 뿔이 난 짐승의 형상이며
이구룡二口龍은 입과 귀가 두 개로 되어 있습니다. 마화상馬畵像은 말의 형상, 삼살보살三殺菩薩은 모든 재앙을 막아주는
잡상이며, 천산갑穿山甲은 인도 중국 등지에 분포된 포유동물의 일종으로 머리 뒤통수에 뿔이 돋혀 있고 등이 다른 잡상보다
울퉁불퉁 튀어 나왔습니다. 마지막으로 나토두羅土頭는 ‘나티’의 다른 표기로써 짐승같이 생긴 귀신으로 용 또는
검붉은 곰의 형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http://cafe.naver.com/edutour.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99에서 발췌-

추녀마루의 잡상..이것 역시 궁궐과 관계있는 건물에 주로 쓰는 방식이라고 한다.
다른 곳에서는 확실히 상으로서 만들기도 했던데 이곳에서는 간소화 된 것 같다.
웬지 현대 조형물같기도 하고...흠흠..


벌써 핀 동백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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