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 국내 유일 토지항쟁 주제의 하의3도 농민운동 기념관을 둘러보며 by 타누키


농민들의 토지항쟁을 주제로 한 국내 유일의 기념관이라합니다.
저번에도 썼다시피 어떻게 보면 고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분쟁의 씨앗, 정명공주방의 20결 절수
정명공주는 조선 14대 임금 선조와 인목대비 김씨와의 사이에 태어난 맏딸로서 선조의 극진한 사랑을 받았다.
광해군 때에는 인목대비와 함께 폐서인이 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다시 공주로 복권되었다.
1623년(인조1)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인 홍주원에게 시집을 갔으며, 이때 하의3도의 땅 20결이 정명공주방에 하사되었다.
그런데 하의3도의 땅 20결은 이미 농민들이 개간한 땅이었다. 조선왕조에서는 주인 없는 황무지는 이를 개간한 자가
소유하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하의3도의 개간지 20결은 아직 양안(토지대장)에 기록되지 못하였고, 정명공주방은
이를 이용하여 이 땅을 사패지로 절수받은 것이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이 땅의 소유권이 여전히 자신들의 손에
있다고 생각했고, 이것이 이후 하의3도 토지소유권 분쟁의 발단이 되었다.

18세기 하의3도민의 저항
숙종에서 영조, 정조대를 거치는 시기 풍산 홍씨가의 세도는 대단한 위세를 떨쳤다. 영조대 홍씨가에서는 20결만이 아니라
새로운 개간지까지 합하여 섬 전체의 150여결의 땅을 모두 하사받았다고 주장하면서 1결 당 쌀 40두씩을 거두어 갔다.
당시 농민들은 정부에 전세, 대동미 23두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일토양세라 칭하면서 부당하게 여겼다.
경종 3년(1723) 하의3도민은 한성부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패소했다. 정조대에 도민들은 대회를 소집하여
윤세민, 김호경을 대표로 뽑아 상경케 하여 신문고를 두드려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왕은 홍씨가의 부당성을
엄중 책망하고 농민들의 토지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그들은 귀향길에 홍씨가에 붙잡혀 관련 서류들을
모두 강탈 당하였고, 홍씨가의 무고로 유배되어 유배지에서 모두 사망하였다.
-안내문에서 발췌-

당시의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저런 문서들도..아래서부터 책은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습니다;;


고종대, 농민들의 첫 승리
고종대 들어 홍씨가의 세도가 약화되자 도민들은 1870년 전라감사 이호준에게 호소하게 되었고, 이호준은 홍씨가의 사람들을
불러 위법성을 꾸짖고 이후 20결 외에 120여 결에 대해서는 절대 세미를 수봉치 못하도록 엄명하고, 20결에 대해서도 1결에
백미 20두씩만 거두어 가도록 하였다. 이는 20결 외의 땅에 대해서 하의3도민의 소유권을 인정한 것으로 농민들의
첫번째 승리였다. 하지만 이것은 20결을 홍씨가의 소유로 남겨둔 절반의 승리였다.

대한제국기
이용익, 하의3도를 내장원의 땅으로 만들다.
대한제국기에 들어와 궁내부 내장원경 이용익은 왕실 재정의 확충을 위해 역둔토, 인삼, 광산 등을 내장원으로
이속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그는 과거 궁방전, 목장토 등의 이름이 붙었던 곳을 다시 조사하여 이를 모두 내장원에
부속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1900년 조사를 마치고 새로 부속된 토지의 명부를 만들었는데, 이 때 과거 정명공주방의
이름이 있던 하의3도의 땅도 다시 내장원의 토지에 포함되었다.

이완용, 하의3도 땅을 홍씨가에 다시 넘기다.
하의3도의 땅이 내장원에 부속된 지 약 5년 후인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내장원 이용익에 의해 빼앗겼다고
생각한 하의3도의 땅을 되찾기 위해 1908년 3월 제실유급국유재산조사국에 반환을 청구하였고
이완용 내각은 홍우록의 소유임을 인정하는 하급증을 발급하였다. 이로써 하의3도 땅은 다시 홍씨가로 넘어갔다.

일제강점기, 홍씨가, 재판 도중에 땅을 팔아 넘기다
홍씨가는 재산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하의3도 땅 전체를 은밀히 조병택(한일은행장)과 백인기에게 팔아 넘겼다.
이들은 다시 목포의 정병조에게 팔았고, 정병조는 일본인 우콘에게 팔아넘겼다. 우콘은 오사카에서 일본 해상운송 화재보험
주식회사 등을 경영하고 있었던 상업자본가였다. 우콘은 도민 대표 중 박씨를 위협과 협박으로 회유하여 홍씨 일가의 홍우승을
상대로 다시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제기하도록 권유하였다. 우콘은 그를 회유하기 위해 그의 소유전답 1500여 두락에
대해서는 소유권을 인정해주기로 약속했다. 박씨는 전체농민의 약 25%에 해당하는 340명이 날인한 백지 위임장을 우콘에게
건네주고 토지소유권 확인소송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다시 소송할 필요가 없다면서 서명을 거부한 도민들은 곧바로
3도민대회를 개최하여 도청과 총독부에 소송취하를 진정하기로 결의하였으나 목포 경찰서가 1913년 7월, 다수의 경찰과
경비선을 동원하여 농민들의 전정운동을 사전에 저지시켰다. 이에 분노한 하의3도민, 특히 부녀자들은 박씨와
그의 일가의 집에 몰려가 이를 파괴하였다. 경찰은 이 소식을 듣고 수백명의 병력을 파견하여 백여명의 도민을 붙잡아
목포형무소에 가두었다. 이에 하의3도민들은 배를 타고 목포로 나가 목포경찰서와 재판소에 몰려가 항의하고
기물을 파손하였다. 이 사건으로 다시 하의3도민 다수가 체포되었다. 경찰은 하의3도민들에게 우콘과 화해하고
그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할 것을 강요하고, 그 조건으로 화의3도민 대부분을 석방하였다. 하지만 제갈훙빈, 윤하태, 문씨,
윤통심, 공문옥, 윤오음, 최문거母, 강순엽 등 8명은 폭도로 지목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리고 지주 우콘은
저수지 축조, 학교 및 병원 설립 등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하의3도의 땅을 다시 도쿠다에게 팔아 넘겼다.
-안내문에서 발췌-

독도문제가 생각나기도 하는...국제재판소에 가자고 했던 주장이 생각납니다;;


하의3도민, 소송을 통해 땅을 되찾다.
1909년 하의3도민들은 홍씨가에서 소작료를 강제로 거두어 가자 경성공소원에 부당이득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하지만 이 소송의 핵심은 하의3도 토지 소유권이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3년을 끈 소송 끝에 하의3도민들은
1912년 일본인 변호사 키오의 도움을 얻어 경성고등공소원에서 승소하였다. 재판부는 토지매매문건, 지도재무서의
수세대장 등을 근거로 하의3도민들의 토지소유권을 인정하였다. 또 정명공주방에서 처음 하사 받은 20결도 토지소유권이
아닌 결세 징수권만 하사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당시 홍씨가 측은 토지소유권을 입증할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 재판은 하의3도민들의 두번째 승리였으며, 완벽한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김응재
1916년 도민대표로서 우콘을 상대로 부당이득반환청구 소송을 목포지청에 제기하고 불납동맹을 결의하였다.
우콘이 김응재의 재산을 차압하였으나 굴하지 않고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진행하였으며
이후 1919년부터 도쿠다를 상대로 토지 매입을 끈질기게 벌였다. 하의3도 토지쟁의실기(1946)라는 기록을 남겼다.
-안내문에서 발췌-

일제 강점기니 일본인이 도와준걸 그대로 받아들일 수야 없는 일이지만 감사비까지 만들어 줄 정도 였습니다.
사실 고정관념대로라면 일본인이 상대인 재판인데 이길 수 있었던 것이 대단합니다;;


새 지주, 도쿠다의 횡포
1919년 9월, 오사카의 무역업자 도쿠다는 우콘으로부터 하의3도 땅 약 400만 평을 20만원에 인수받았다. 이는 우콘이
받았던 소작료의 거의 2배에 달하는 것이었다. 도쿠다는 목포에 덕전양행을 설치하고 전 육군 중위인 미야기를 주임으로
파견하고 예비역 헌병 보조원, 전 순사 등을 사무원으로 채용하여 주임-사무원-마름-소작인이라는 농장 지배체제를
정비하였다. 도쿠다는 갖은 위협과 협박으로 우콘 때부터 소작료를 체납해 온 농민들의 가산을 차압하고, 반항하는 자는
구타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이러한 탄압 가운데 김준열은 구타와 폭행으로 사망하였다.

하의3도민의 토지매수운동과 상애회의 개입
1923년 이후 하의3도민들은 억울하지만 도쿠다에게 토지를 되사서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도민들은 김응재 등 6명의 대표를 뽑아 토지매수 대금 20만원을 마련하는 일에 나섰다. 하지만 20만원을 모으는 일은
어려운 일이었다. 김응재는 매수 자금을 빌리기 위해 친일 단체 상애회의 회장 이기동을 만났다. 이기동은 자금 지원을
약속했지만, 이를 지키지 않았다. 상애회 부회장 박춘금은 하의3도 문제에 개입하여 1924년 경찰과 함께 하의3도까지 와서
도민들에게 도쿠다의 지시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면서 폭력을 휘둘렀다.
-안내문에서 발췌-

소송에서 이겼다고 끝일줄 알았더니 새 지주가.....홍씨일가처럼 팔은 것같습니다.
특별히 소유권이 넘어간 부분에 대해 설명이 좀 부족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의도농민조합운동
1927년 최용도와 고장명 등 오사카에 거주하던 하의3도 출신 노동자들은 친목도모를 위해 하의노동청년회를
조직하였고, 그 해 6월 오사카에서 사회운동에 종사하던 일본인 아사히 미즈이에게 하의3도 토지 문제에 대해
설명하고 하의3도 농민조합 결성 지원을 요청하였다. 1928년 1월 2일에 최용도 외 하의3도민 약 3백 여명이
모여 하의도 농민조합 발대식을 개최하였다.

아사히 미즈이
오사카에서 사회운동에 종사하며 조선인 노농운동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1927년 6월 아사히는
최용도와 고장명으로부터 하의3도 토지문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하의농민조합의 결성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는 하의도에 2년간 머무르면서 한복을 입고 하의도민들과 동고동락하였다. 1928년 하의농민조합 사건시 검거되어
면소처분을 받고 사실상 일본으로 추방되었다. 또한 일본인 변호사 키오는 그의 사무원 남만웅과 함께
3년여의 시간을 끌어 온 부당이득반환청구소송을 승리로 이끌었다. 변호사 후루야는 1927년 11월 하의3도를 방문하고
경성에 올라가 기자회견을 통해 하의3도 사건을 세상에 널리 알렸다.

최용도, 고장명
1927년 하의3도 대리 출신 최용도와 상태서리 출신 고장명은 오사카에서 친목 도모를 위하여 하의노동청년회를
조직하였는데 이 조직은 훗날 결성된 하의농민조합의 모태가 되었다. 1928년에는 하의도농민조합을 결성하였고
최용도는 농민조합 집행위원을 고장명은 교육부장을 담당했다. 이 후 박춘금의 상애회와 충돌하여
최용도는 징역 6개월, 고장명은 무죄를 선고 받았다.

강령
장래 일치 단결하여 조선 전 무산계급의 운동과 결합하여 전 세계 무산계급의 절대적인 응원 하에
용감히 강욕한 지주의 압박과 관헌의 간섭과 열악한 소작제도로부터 해방되어 큰길로 나아가기 위해 전진하자!

하의도 농민조합과 상애회의 충돌
1928년 도쿠다는 하의농민조합을 분쇄하기 위해 친일폭력조직인 상애회의 박춘금을 다시 하의3도에 파견하였다.
이때 농민조합원들은 박춘금 일행과 강력히 맞섰고, 박춘금은 자신이 신체적 위협을 당했다고 목포경찰서에 고발하여
농민조합 간부들이 체포되고 수많은 사람들이 징역 6개월의 선고를 받았다.

반총독정치, 반일투쟁으로..
하의농민조합은 4월 20일자로 하의노동회를 통해 일본 농민조합 전국대회에 격문을 보냈다.
-안내문에서 발췌-

지금과는 다른 사회주의가 어느정도 한창(?)이었던 시대의 강령이다보니 좀...;;
하긴 요즘도 이런 비슷한 강령을 내걸기도 한다니...;;


해방과 새로운 지주, 미군정청의 등장
8.15 해방과 함께 일본인 지주들이 이 땅을 떠나갔다. 하의3도 농민들은 조선 선조 이래 지난 4세기에 걸친
기나긴 농지탈환운동이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해방된 지 한 달도 못된 1945년 9월 11일 미군정청이
발족되고, 미군정은 신한공사를 세워 일본인들의 토지를 모두 신한공사에 부속시켰다. 이에 따라 도쿠다 소유의
하의3도 농지도 신한공사로 넘어갔고, 신한공사는 1946년 여름 농민들에게 소작료를 납부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하의3도 농민들은 새로운 지주로 등장한 신한공사에 소작료 내는 것을 거부하였다.

신한공사 하의지부의 설치
미군정은 1945년 11월 12일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신한공사로 개칭하고, 동척과 일본인 소유토지를 접수, 관리하였다.
일본정부나 기관 및 개인이나 단체가 소유, 관리했던 모든 종류의 재산과 수입에 대한 소유권이 미군정청 산하의
신한공사에 귀속되었다. 미군정청은 1945년 11월 10일 소작료에 관한 건을 공포하여 종래의 소작계약이 수확고의
3분의1을 초과할 수 없다는 소작료 3.1제를 실시하였다. 1946년 2월 21일 미군정청 법령 52호에 의해
신한공사 하의 지부가 이전의 도쿠다 농장 관리사무소에 설치되었다.

하의3도 7.7 농민항쟁
7.7 농민항쟁의 시발지 - 오림리
오림리는 하의도 7.7농민항쟁의 시발지로서 신한공사 직원과 목포경찰서 경찰로 구성된 소작료합동징수조의
폭행과 실탄사격에 맞서 제1대의 무장을 해제시켰다.

항쟁의 땅 - 대리
오림리와 함께 하의3도에서 가장 큰 마을인 대리는 농민들의 항의에 맞선 경찰의 사격으로 인해
1명의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분노의 땅 - 웅곡리
웅곡리는 하의3도 경찰 부서와 신한공사 출장소가 소재한 곳으로 음력 7월 7일 분노한 농민들에 의해
경찰분서, 출장소, 창고가 불태워졌다.
-안내문에서 발췌-


농민운동의 거점, 신안
신안군에는 하의3도 외에 암태도, 도초도, 자은도, 매화도, 지도 등 많은 섬들이 있다. 1923년 수확량의 70-80%를
거두어 가는 악덕 지주에 대항한 암태도민들의 힘들고 긴 농민 항쟁의 승리는 다른 섬들의 농민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1924년, 25년 경 도초도, 자은도, 매화도, 지도 등 인근 섬 지역의 소작농민들도 각각 소작쟁의를 일으키며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이 지역의 소작쟁의는 1920년대 식민지조선의 대표적인 소작쟁의로서 악덕 지주에 대한 권리 찾기를
넘어서서 그들을 비호하는 일제 관헌에 대한 항일 운동이기도 했다. 하의3도는 토지탈환운동으로, 암태도 등 다른 섬들은
소작쟁의로, 신안군은 식민지시대 농민운동의 메카와 같은 구실을 하였다.

한국최초의 소작쟁의 암태도 소작쟁의
1920년대 일제의 저미가정책으로 지주의 수익이 감소함에 따라 지주들이 소작료를 증수하기 시작했다. 이에 암태도의
소작인들은 1923년 9월 암태소작회를 결성하고, 소작료 인하를 요청하였으나 묵살되자 소작료 납부를 거부하기 시작했다.
한편 지주측의 폭력적 도발에 맞서는 농민들의 투쟁이 격화되면서 시위를 벌이고 농성에 들어간 결과
마침내 1924년 9월 30일 소작료 인하와 일부 검거자 석방 등의 쾌거를 이루었다.

국회, 1950년 하의3도 농지의 무상반환을 의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7월 하의3도 면민 대회가 열렸고, 전라남도는 하의3도민들의
무상 환원 진정을 받아들였다. 1949년 8월 1일 국회의원과 농림부 직원들이 현지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국회에서는
1950년 2월 하의3도 농지에 대한 소유권 무상 환원을 만장일치로 의결하였다.

1956년 유상환원으로 최종 결론
그러나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하의3도민들에 대한 농지 무상 환원조치가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하의3도민들은 재차 국회에 탄원하였지만, 정부는 다른 지역과의 형평성을 내세워, 무상환원이 아닌 유상환원으로 분배하였다.

하의3도 토지소유권 등기과정
농지소유권등기 이전의 지연
농지 등기신청 상황
1. 1993년 11월 신안군 의회의 조사에 의하면, 도쿠다의 분배농지 가운데 여전히 등기이전이 되지 않은 농지가
약 5800여 필지로서 전체 9167필지의 62%에 해당함
2. 이후 등기를 정리하였지만 1994년 3월까지도 미등기 농지는 600필지로 확인됨(신안군 조사)
3. 이후 대부분의 미등기 농지도 등기가 완료됨

농지 등기 이전이 저조했던 이후
1950년대 이승만 정부는 하의3도 농지의 유상분배 대신 농민들의 등기비용을 정부가 전액 부담하여 등기 이전을
해주기로 하였으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따라서 농민들의 소유권을 증명할 등기 이전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내문에서 발췌-

정말 기구한 시대를 지내온게 아닐 수 없습니다;;
물론 일본인 지주에게 사들이는 값보다야 낮게 책정했겠지만 결국 유상반환이라니...
전쟁 후 나라재정 때문에 결국 도민들도 포기한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의3도의 당제
하의3도에는 대리당, 문절리당, 어은당, 가개목당, 벌섬당, 유호리당, 벗언당, 농산당, 신도당, 대야당, 노루자리당 등
11개의 당이 있다. 당할아버지와 당할머니를 주신으로 모시는데, 마을마다 특색이 있다. 대리당은 하의3도 본당으로
유교적 의식을 엄격히 지키는 당으로 하의덕봉산후토신, 후직신, 구룡신, 주조기신, 풍백신, 우신, 뇌신 등 7신위를 모신다.
또 상태도 동리의 경우에는 불교와 융합된 당제를 모시는데, 상당에는 도승(대사님)을 하당에는 상좌 보살님을 모셨다.
주민들은 당제를 경건하고 신성하게 지낸다. 제관은 남성들이 맡는데, 정초 날씨가 추워도 제관들은 목욕하기를 자주하고
신성하게 제물을 준비한다. 오늘날까지 마을에 큰 탈 없이 잘 지내게 된 것은 당제를 잘지내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안내문에서 발췌-

하의3도의 역사를 보고나니 큰 탈없이라고 보긴 좀....;;; 아마 반환 이후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대부분이 토지항쟁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은 민속 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의 연자방아 놀이
연자방아는 밑돌(둥근맷돌) 위에 윗돌(둥근맷돌)을 세워 이를 말과 소가 원형으로 돌면서 밑돌 위에 있는 곡식을
탈곡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의3도 연자방아 놀이는 말과 소를 사용하지 않고 사람들이 끌고 돌면서 곡식을 탈곡하며
이때 북, 장고, 징, 꽹과리 등의 장단가락에 맞춰 농악꾼들이 잦은 가락으로 타령조 농요를 부른다. 특히 서로 다른 편에서
한명씩 나와 힘(씨름)을 겨루어 장사를 정하는 것은 하의3도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방식이다.

신의면 쟁풀이 농악놀이
쟁풀이 놀이는, 임진왜란 이후부터 각 섬에서 행해지고 있는 농악놀이로서, 호남농악의 영향을 받아 밑놀이 굿가락이
다채롭게 잘 살리고 있는 특색있는 농악놀이다. 특히 지역적인 특성으로 수많은 외적의 침탈을 받아 온 도서민들의 외적에
대한 적개심과 부락의 안녕과 풍년을 소원함을 잘 나타내고 있고 다양한 형태를 구사하는 농악놀이다. 쟁풀이 농악놀이는
정월초부터 대보름 사이에 진행되는데 모든 부락민들이 모여 즐기는 전통 민속놀이이다. 놀이의 형태는 부락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기원 농악놀이, 왜적을 잡아 처형하는 처형굿 농악놀이, 처형 후 부락민들이 처형한 왜적의 목을
달아 놓고 나라에 대한 충의에 즐거워하는 한판 농악놀이가 있다.
-안내문에서 발췌-

모형은 연자방아 놀이만 만들어 놓았지만 놀이나 굿을 모형으로 잘 재현해 놓은게 괜찮네요.


나오면서 보니 이휘호여사의 화환이...알고봤더니 개관한지 몇개월이 채 안되었었습니다.


하의3도를 나타내는 조형물..


옆의 섬들도 같이 나타낸...위의 조형물과 뜻이 겹치는 느낌이라 좀.....


전체적으로 깔끔한 느낌입니다만 올해 개관했는데 한문이라니...영어가 아닌게 다행이긴 하지만 좀 어색합니다.
게다가 안의 전자적인 동작 장치도 몇개는 돌아가지 않고 자동인형극같은 곳이 있었는데
친일행력이 있는 박씨로 추정되는 인형이 사라지고 플레이되는 등 수상쩍은 부분이 있더군요.
소록도의 경우 해방 이후 친일파때문에 문제가 많았다는데 그런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흠흠..
사람이 없어서 그런건지 어쩐건지는 모르겠지만 관리자가 계속 따라다니는 것도 거북했습니다.
이런 거북함은 리움미술관에서 정도밖에 느껴보지 못했는데 좀....사진이 안된다는 표지판도 없었고
사진을 찍기 때문에 따라다닌다고 하기엔 찍어도 별 반응이 없으니;;
추정되는 이유로 제일은 아마 심심해서가 아닐까 싶긴 합니다. ㅎㄷㄷ


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휘호여사의 기념식수...4월말의 개관식 기념이라는데 은목서입니다.
향이 꽤 좋다고 하는데 언제 한번 볼 수 있으련지...


1885년의 문응두 선덕비, 1903년에 세워진 도장 권재찬과 1912년에 세워진 변호사 고노부쓰노스케, 변호사 사무원 남만웅
지도군수 김동우, 영세불망비가 있습니다.

권재찬에 대한 이야기론 1900년대 하의3도에 흉년이 들어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고 있을 때 하의도 궁장에
파견된 군재찬 도장이 궁장의 양곡을 풀어 구제해 준 은덕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문응두 선덕비는 하의면 대리마을 당제를 지낼 때 마을 주민 문응두씨가
황소 한마리를 내놓은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합니다.


최하림 시인의 삼백 삼십 삼년 뒤에 부르는 노래
역사는 오늘도 피눈물 흘리며
바다를 건너가고 건너온다
우리는
역사의 피눈물을 똑똑히 본다
똑똑히 보면서 연꽃섬의 연꽃을
한 소리로 노래한다
평화이고 평등인

하나이고 수천으로
바다 가운데 두둥실 떠오르는
아아
하의여!
눈부신 하의여!


기념관 주변에 많이 심어져있는 꽃댕강나무...나무를 문지르면 댕강소리가 난다는데 우리나라가 원산지로
우리나라의 정태현박사가 북한의 맹산에서 발견했다고 합니다. 인동과라고하는데 인동초를 생각해 심은 것일지도...



덧글

  • espoon 2009/09/10 13:40 # 답글

    좋은내용의 포스트 감사드려요~
  • 타누키 2009/09/10 20:57 #

    헛 감사합니다~;;
  • espoon 2009/09/11 10:01 #

    스푼 계속 이용 & 사랑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 흐미 2012/08/29 22:43 # 삭제 답글

    고맙습니다.덕분에 기분좋게 읽고 갑니다. 궁금했었는데
  • 타누키 2012/08/30 11:52 #

    방문 감사합니다~ ㅎㅎ
댓글 입력 영역
* 비로그인 덧글의 IP 전체보기를 설정한 이글루입니다.


구글검색


www 내 블로그 검색

사이드1

사이드1.5

2019 대표이글루_음식

2018 대표이글루_photo

예스24

통계 위젯 (화이트)

130444
2634
5564967

이 이글루를 링크한 사람 (화이트)

205

메모장 드래그금지버전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anngabriel.egloos.com의 저작물인 이 저작물은(는)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4.0 국제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 라이선스의 범위 이외의 이용허락을 얻기 위해서는 anngabriel.egloos.com을 참조하십시오. Locations of visitors to this page

사이드3

구글아날

구글아날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