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 대웅보전과 육층석탑, 관음전 by 타누키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지정일:1963. 1. 21). 선운사의 본전(本殿)으로서 신라 진흥왕 때 세운 것으로 전하며
지금 있는 건물은 조선 성종 3년(1472)에 중건하여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 5년(1613)에 다시 지은 것이다.
건물의 평면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긴 장방형 평면을 이루고 있고, 전체적으로 기둥 옆면 사이의 간격이
넓고 건물의 앞뒤 너비는 좁아 옆으로 길면서도 안정된 외형을 지니고 있다.

다포계(多包系) 맞배지붕에, 벽의 양 측면에는 풍우를 막기 위해 널판으로 풍판(風板)을 대었다.
막돌로 허튼 쌓기를 한 얕은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약한 배흘림이 있는 두리기둥을 세웠다.
정면의 모든 칸에는 빗살 창호를 달았으나 후면에는 중앙 칸에만 창호를 달고 양 측면의 협칸에는
교창(交窓)을 달았다. 동쪽 면은 모두 벽체로 처리하고 서쪽 면에는 외짝 출입문을 달았다.

내부는 통칸으로서 불벽(佛壁)을 한 줄로 세워 그 앞에 불단을 만들었으며, 불단 위에는
흙으로 빚은 목조(木造) 삼세불을 봉안하고 삼존 사이에는 근래에 조성된 보살입상을 협시로 세웠다.
삼존은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주존(主尊)으로 하여, 왼쪽에 아미타불과 오른쪽에 약사불을 모셨다.
삼존불상 뒤의 후불벽화는 1688년(숙종 14)에 조성한 것으로, 중앙의 비로자나불회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미타회상도ㆍ약사회상도가 각각 자리잡고 있다.

천장에는 사실감이 돋보이는 커다란 운룡문(雲龍紋)이 그려져 있고, 안쪽 천장에는
우물 정(井)자 모양을 한 우물천장을 설치하여 구름ㆍ학ㆍ연꽃 등으로 장엄하였다.
내부 벽에는 산수ㆍ비천ㆍ나한 등을 벽화로 장식하였고, 닫집과 중앙의 불단 등은
비교적 간략하고 단순한 모습이다. 이 건물은 미술사적으로 조선 후기의 뛰어난 건축기술과 조형미를 지니고 있다.
-http://www.koreatemple.co.kr/에서 발췌-


대웅보전 후불벽화
대웅보전의 중앙 후불벽 3면에 그려져 있는 벽화로 각각 세로 465cm, 가로 320cm의 흙벽에 회칠을
하고 채색하였다. 이 후불벽화는 존상(尊像)으로 봉안되어 있는 비로자나불ㆍ약사여래불ㆍ아미타불의 뒷벽에
각각 그려져 있는 것으로, 중앙은 비로자나불회, 우측은 약사불회, 좌측은 아미타불회도를 나타내었다.

비로자나불회도 하단에 기록된 화기에 의하면 이 벽화들은 1840년 현세에 수복(壽福)을 누리고 내세에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조성한 것으로, 성찬(性贊)의 화주로 익찬(益讚)ㆍ내원(乃圓) 등 11명의 화원이 그린 것이다.
대웅보전 삼불회 벽화와 관련된 자료로 선운사사적인 '전각요사창건연대방명열목'을 들 수 있는데
이에 의하면 1839년 큰 비로 법당 오른쪽 2칸이 무너져 1840년 봄과 여름에 보수 및 단청을 했으며
화주는 성찬(性贊)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은 1840년 여름에 있었던 단청불사와
대웅보전 후불벽화의 화기에 적힌 화주 성찬과 일치한다.

비로자나불회도는 세 폭의 벽화 가운데 중앙 그림으로, 거대한 화면에는 지권인을 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상단에 사천왕이 배치되었다.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 보현보살은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가진 비로자나불은 소용돌이 모양의 나발(螺髮)에 쌍꺼풀진 눈, 내려온 눈썹이
특징적이다. 색조는 적색ㆍ녹색ㆍ흰색이 주조색이며,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를 띠고 있다.

약사불회도는 약합을 들고 있는 약사여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광보살과 월광보살이
협시하고 있으며, 상단에 2보살과 4제자가 배치되었다. 약사삼존도 비로자나삼존과
같이 화면 아래에서 줄기가 솟아 올라온 연화좌 위에 자리하고 있다.

아미타불회도는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협시하고, 상단에 2보살과
2제자, 팔부중 가운데 2위가 배치되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지만 녹색 계열과
흰색 등이 많이 사용되어 전체적으로 푸른 느낌이 많이 돈다.
-http://www.koreatemple.co.kr/에서 발췌-


멋드러진 공포들...하악하악 -ㅠ-);;


육층석탑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29호(지정일:1973. 6. 23). 선운사 대웅전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방형의 축대 안에 지대석을 놓고 그 위에 정사각형의 돌 윗변을
둥글게 처리한 하대석을 얹었다. 그 위에 다시 방형의 중석(中石)을 세우고 중석의 네 귀는 우주(隅柱)로
조각하였다. 갑석(甲石)은 방형으로 되어 있는데 아랫면은 수평으로 다듬고 중앙에는 1단의 받침을 새겼으며
윗면은 약간의 경사를 이룬 채 중앙에 1단의 옥신(屋身) 괴임이 있다. 각 층의 옥신은 하나의 돌로 만들고 네 귀마다
우주를 조각하였으며, 추녀는 수평을 유지한 채 하늘을 향해 약간 반전되어 있고 낙수면의 경사는 완만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탑신의 2층 옥신 높이가 급격히 줄어들고 3층 옥개석 역시 2층에 비해 폭이 좁아져 체감률이 심한 편이며
3층 이상부터는 동일한 체감률로 이루어져 있다. 6층의 옥개석 위에 노반이 있고 노반 위에 복발(覆鉢)이 남아 있으며
그 위에 팔각의 귀꽃으로 각출된 보개(寶蓋)를 얹어 놓았다.

사적기에는 조선 성종 때 행호선사(幸浩禪師)가 홀로 우뚝 솟은 이 9층석탑을 보고 사찰의 중창을 도모했다고 적고 있어
현재의 탑은 성종 이후 3층이 유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http://www.koreatemple.co.kr/에서 발췌-


배롱나무 꽃도 만개~


관음전
관음전은 관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원통전(圓通殿)이라고도 한다.
선운사의 관음전은 대웅보전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대웅보전과 영산전 사이의 요사채를 관음전으로
사용하다가 이를 허물고 1990년 지금의 자리에 신축하였다. 그러나 선운사사적기에 1474년 관음전을 완공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정유재란으로 폐허가 된 이후 중창을 하면서 1705년에도 관음전을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전부터 부속전각으로 존속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관음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이 익공 형식으로 쇠서에 연화를 달고
보머리 앞에 봉황두를 두는 등 장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내부는 가운데 부분을 평반자로, 전후면의 퇴칸에는
빗반자를 두었는데 중앙의 우물반자는 2줄로 두고 연화문으로 장식하였다. 빗반자에는 화문을 두고
대들보에는 좌우측에 청용과 황룡을 그려 장식하였다. 보물 제279호로 지정된 금동지장보살좌상을
봉안하였고, 그 뒤에 십일면천수천안관음보살탱을 봉안하였다. 근래까지만 해도 관음전이라는 편액을
달았으나, 지장보살이 봉안되어 있어서인지 현재는 편액을 뗀 상태이다.
-http://www.koreatemple.co.kr/에서 발췌-

현재는 다시 관음전 편액을 달고 있습니다.


본래 보물 279호인 관음전 금동지장보살좌상가 있어야하나 없습니다. 바깥에 다른 모습의 관음상 사진을
걸어놓은걸 보면 새로이 관음상을 세울려고 하는 것 같네요. 관리때문이려나요. 흠...
아름다운 좌상인데 못보게되어 아쉽습니다.

과거 도난당한 적이 있다는데 그에 얽힌 이야기가 있어서 가져와봤습니다.
지장보살상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영험함을 보인 사실로 인해 더욱 널리 추앙받고 있다.
1936년 어느 여름에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매매하여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영이(靈異)를 나타내기 시작하여,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다. 어서 그곳으로 돌려 보내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다소 이상한 꿈으로만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으나 그 역시 이를 무시하였고,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주지는 ‘이우운(李雨雲)’으로 기재되어 있다.
-http://www.koreatemple.co.kr/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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