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삶으로 유명한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이 오랜만에
연출한 작가 미상이라 나름 기대했습니다만...이건 정말 훌륭한 작품이네요.
시간도 길고 독일, 전쟁, 미술 등 쉽지 않은 소재라 우려하는 바도 있었지만
정말 이정도로 만들어내다니 전작인 투어리스트로 아쉬웠던 감독이었는데
역시는 역시였네요. 누구에게나 추천드리며 현실적이면서도 미학적으로
너무 좋았습니다.
나치를 거쳐, 동독, 서독에 이르기까지 전체주의로 인해 개인이 철저히
매몰되어온 시대에서 자신이라는 확고한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던,
진실의 눈을 가지고 있던 인물들이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되었는가를
집요하게 그려내고 있어 작가 미상이라는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진짜...
어떻게 보면 기생충의 봉준호가 언급했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라는 것을 미술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소재에 매몰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오는 모습은 그렇기에 더욱더 찬사할만한 시선이었구요.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이야기라는 것은 나중에 알았는데 원작이라고 하는
위르겐 슈라이버의 한 가족의 드라마도 읽어보고 싶네요. 전체적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계속 눈물이 날 정도로 너무 마음에 드는 작품입니다.
안토니우스 판 페르텐(실제론 요셉 보이스) 역의 올리버 마수치는 이런게
진짜 교수라는 느낌이었네요. 졸전 전의 크리틱에서도 본인이 말했던 바를
잊어버리는 수준의 교수만 봐오다보니...
이하부터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메이 역의 사스키아 로젠달
결국 모든 것의 알파이자 오메가, 개인의 기억에서 강렬한 트라우마가 되는
좋게 말하면 뮤즈의 역할을 너무나 환상적으로 해내서 대단했습니다.
나치가 되지 않아 쫓겨났던 가족사에도 퇴폐미술로 폄하되던 당대 미술을
관람하게 해주기 위해 도시까지 같이 나와주고 마지막과 수미상관이 되는
버스 경적을 이용한 오케스트라적 자유를 만끽하는 모습은 와...
처음보는 배우인데 히틀러에게 꽃을 바치는 전체주의 하의 개인과 세상의
진실을 라(A)음을 통해 봐버린 개인에서 결국은 정신이 분열해버리는데
전쟁의 수세에 몰리던 독일 나치는 유태인이 아닌 장애인과 정신질환자들도
가스실로 내몰면서 메이도 죽게 되는 모습은 정말...특히 소아마비까지
재현하여 주제처럼 진실에 눈을 돌리지 않고 가감없이 담아내서 대단했네요.
드레스덴 폭격으로 죽어가는 독일인들도 잔인할 정도로 어른 아이할 것없이
눈을 돌리지 않고 렌즈에 담아내 진짜 용기있는 행동이라고 보여졌습니다.
쿠르트의 가족들도 그렇고 어쩔 수 없이, 잔학행위에는 몸담지 않았더라도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그려내는건 결국 집단의 뒤에 숨는 개인들의
변명을 차단해내는 것 같더군요.

쿠르트 역의 톰 쉴링
어려서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이던 그가 메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의 진실을
깨닿고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괜찮다는 모습을 보여주는건 정말 ㅜㅜ)b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동독, 독일 민주공화국에 편입되어 소련의 지배를
받는 모양새가 되다보니 역시 마찬가지로 나, 나, 나를 지우고 예술이
민중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미술에 의해 개인이 파묻혀버리는
모습은 참...결국은 아직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기 전이라 기차를 통해
서독으로 넘어가는게 다행이더군요.
그 이후 나, 나, 나의 세상인 뒤셀도르프의 자유로운 모습은 현대미술도
과격해할만한 혼돈의 카오스 와중이라 60년대의 풍경이지만 현재의 작업과
그리 다르지 않아 보이는게 흥미롭습니다. 물론 부여된 개인 작업실 공간이
저만큼 엄청난건 진짜...부럽던 ㅜㅜ 작업실 자리 배정과 한평이나 될만한
공간때문에 비좁던걸 생각하면 ㅠㅠ 우리나라 미술이 독일 미술의 영향이
많았다고 하던데 꽤나 재밌었네요.
결국은 시행착오를 거치고 자신의 작업을 찾아낸 모습에선 감동이...
메이가 못 보았던 자유의 시대를 버스 경적을 통해 이어주는 엔딩으로
그녀에게 바치는 연출은 역사와 단죄라는 시대적 소재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이라는 개인의 시대를 진정으로 맞이하는 모습이라 참으로 좋았습니다.
작품 인터뷰에서 개인의 개인사를 통해 드러내지 않고 작업하는 개인주의적
작풍을 작가 미상이라는 말로 표현해냈는데 단순히 작가를 알 수 없다는
작가 미상을 생각했던지라 꽤나 울림있는 연결로서 마음에 들었네요.
뭐 결국엔 드러나기 마련이겠지만 설명을 줄이고 보는 것으로 느껴질 수 있는,
구상주의로 표현했지만 추상주의적인 면도 갖추고 있는 작품을, 그야말로
현대미술이 어떻게 시대를 뚫고 만들어지는가를 그려낸 영화라고 봅니다.

엘리 역의 폴라 비어
메이가 봤던 그림의 소녀가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로미오와 줄리엣도
이정도는 아니었을 것 같은;; 플래쉬백으로 겹치는 현실고발적인 연출도
그렇고 칼이 결국 엘리의 자궁에 손을 대어 낙태와 난임을 만들어내는 건
진짜 잔인하면서도 작품의 기조를 충실히 이어가는 모습이라 좋았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르트의 사람적인 면(물론 잘생..)을 끝까지 믿고
그를 택하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네요. 결국은 임신에서 출산까지 성공한~
4개월차의 계단 실루엣 작품은 너무 매력적인 ㄷㄷ 엘리자베스 메이와
같은 엘리자베스라는 인연에서 박차를 가하긴 했지만 천생연분이란게
이런 것이라는 것을 제대로 보여줘서 심각한 와중에 달달하니 ㅜㅜ)b
프란츠에서도 인상적이었는데 앞으로도 나올 작품이 많아서 기대됩니다.

칼 시반트 역의 세바스티안 코치
의사임에도 장애인과 질환자들을 가스실로 보내는데 일조한 극악한 전범을
진짜 제대로 보여줬네요. 소련의 지배에서도 할 수 있으니 한다는 것을
기회의 전환으로 이용하기도 하고...아무래도 친일파가 떠오르는데 그렇기에
마지막의 처벌적 엔딩이 아닌 것이 이해가 가더군요. 또 그렇기에 더욱더
좋았다고 봅니다. 딸이 결국 떠나간 이유도 직접 드러나진 않아도 막연하게
기억으로 남았던 나치시절의 기억들이니...단죄하는 시원함은 없지만;;
부인인 마르타(이나 베이세)는 쿠르트를 받아주는 등 이해심이 있었지만
결국은 칼과 함께 잡히기 전에 세상을 유람하며 즐기는 모습이라 참...

자유의 시대를 맞이하여 서독으로 넘어갔을 때, 그래도 동독에서 넘어온
화가가 추천하는 회화적인 도시들을 선택하지 않고 제일 현대적인 기조의
뒤셀도르프를 찾아가는 모습은 정말 대담하고 멋있고 부러웠습니다.
그리고 당시의 행위예술적인, 형식파괴적인, 미학적인 예술들에 둘러쌓여
자신을 잃어버렸음에도 결국은 다시 자신이 하고 싶은, 진심으로 하고 싶은
회화로 돌아와 모든걸 떨쳐내고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며 진실에 눈을 돌리지
않는 자신만의 거리에서 표현하는 쿠르트의 모습은 진짜 대단했네요.
칼의 모습과 겹치는 모습은 어찌보면 인위적이고 이질적이라 아쉬운 점도
살짝은 있었지만 마지막 엔딩을 생각해보면 이정도는 집어넣어도 될만한
주제였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시도 끝에 마지막 졸전에선 세미 극사실주의적인
그림에 판타지적인 주제를 보카시를 활용해 넣는 작품을 냈었고 나중에는
더 그려보고 싶었는데 이러한 작품에서 보카시를 보다보니 감정이입이
더욱더 되어서 더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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